부산 KT의 포인트가드 허훈은 지난 2월9일 부산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안양 KGC인삼공사와의 경기에서 프로농구 역사상 처음으로 득점과 어시스트로 '20-20'을 달성했다.
허훈은 코트를 지배했다. 24득점, 21어시스트를 기록해 KT의 91대89 승리를 이끌었다.
대기록이 전부는 아니었다. 허훈은 경기 막판 남다른 '농구 DNA'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KT가 5점차로 쫓긴 4쿼터 막판 허훈은 공격형 가드의 진수를 보여줬다. 포인트가드의 역할을 넘어 해결사로 나섰다.
동료들은 허훈이 1대1 공격을 펼칠 공간을 열어주기 위해 외곽으로 나갔다. KT가 아이솔레이션(isolation) 전술을 가동한 것이다. 허훈은 중거리슛을 성공했다. 4점차로 좁혀진 종료 57.3초 전에도 1대1 공격을 시도해 또 한번 중거리슛을 터뜨렸다.
포인트가드는 코트의 야전사령관이라 불린다. 팀의 공격 전개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있다. 그런데 KT의 막판 아이솔레이션 전술은 허훈의 즉흥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서동철 감독의 지시였다.
허훈은 경기 후 "감독님의 지시였다. 올-아웃(all-out) 상태에서 1대1을 하라고 하셨다. 감독님이 저를 믿어주셨고 그에 보답한 것 같다"고 말했다.
KBL 코트에서 아이솔레이션 전술은 종종 볼 수 있다. 그 역할은 주로 외국인선수에게 주어진다. '토종' 가드가 승부처에서 팀의 운명을 결정할 공격권을 1대1로 전개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과거 농구대잔치 시절에는 그런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농구 대통령' 허재가 주로 했다. 허훈은 허재 전 국가대표 감독의 차남이다. KGC인삼공사전 막판의 활약상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허훈의 활약은 시즌 내내 빛났다.
허훈은 작년 10월20일 원주 DB와의 경기에서 프로농구 사상 최초로 한 경기 9개 연속 3점슛 성공이라는 진기록을 썼다. 하루 전 창원 LG와의 경기에서는 개인 최다 32득점을 몰아쳤다.
현대 농구에서 패스를 먼저 생각하는 전통적인 포인트가드의 개념은 흐릿해졌다. 득점력을 겸비한 가드가 더 주목받는 시대다. 허훈은 현대 농구의 트렌드에 잘 부합한다. 화려한 기술과 폭발력을 두루 갖춘 허훈은 지난 시즌 프로농구 흥행의 한 축을 이뤘다.
허훈의 2019-2020시즌 성적은 눈부시다. 허훈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조기 종료된 프로 3번째 시즌에서 35경기에 출전해 평균 14.9득점, 7.2어시스트, 2.6리바운드, 1.2스틸을 기록했다.
허훈은 어시스트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올랐다. 프로농구 역사상 평균 14득점 이상을 올리면서 어시스트 1위를 차지한 선수는 허훈 이전에 5명이 있었다.
-1997시즌 강동희 : 평균 15.6득점, 7.3어시스트
-1998-1999시즌 이상민 : 평균 14.4득점, 7.9어시스트
-2008-2009시즌 주희정 : 평균 15.1득점, 8.3어시스트
-2010-2011시즌 양동근 : 평균 16.5득점, 5.5어시스트
-2011-2012시즌 크리스 윌리엄스 : 평균 23.8득점, 6.0어시스트
모두 KBL의 역사를 대표하는 포인트가드다. 그 중 강동희, 이상민, 주희정은 해당 시즌 정규리그 MVP에 올랐다. 양동근이 눈부신 성적을 남긴 2010-2011시즌 MVP는 KT 돌풍을 일으켰던 박상오가 차지했다.
2011-2012시즌에는 외국인선수 MVP 부문 시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만약 있었다면 윌리엄스의 수상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외국인선수의 출전이 쿼터당 1명으로 제한된 2019-2020시즌에는 국내선수의 기여도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실제로 그랬다. 허훈을 필두로 김종규(원주 DB), 송교창(전주 KCC), 이정현(전주 KCC), 김선형(서울 SK), 최준용(서울 SK) 등 '토종' 스타들의 활약이 눈부신 시즌이었다.
특히 허훈은 팀 공격을 지휘하는 야전사령관으로서 득점력 뿐만 아니라 발군의 어시스트 능력을 뽐냈다. 또 화려한 기량과 스타 기질로 농구 팬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허훈이 남긴 강렬한 임팩트는 정규리그 MVP 수상으로 이어졌다.
허훈은 20일 오후 서울 논현동 KBL센터에서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취재진 없이 최소 인원이 참가한 '랜선 시상식'에서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다.
KT는 21승22패로 정규리그 6위를 차지했다. 포스트시즌 진출 마지노선에 턱걸이했지만 승률은 5할 미만이었다.
팀 성적 면에서는 DB를 정규리그 공동 1위(28승15패)에 올려놓은 김종규(평균 13.3득점, 6.1리바운드)가 높은 점수를 받을만 했지만 투표에 참여한 취재기자단의 표심은 허훈이 남긴 강렬한 인상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이로써 허훈은 '농구 대통령' 아버지도 받지 못한 KBL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다.
사실 허재의 KBL 수상 경력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1997-1998시즌 챔피언결정전 MVP, 1999-2000시즌 정규리그 베스트5, 2002-2003시즌 이성구 모범상 수상이 전부다.
허재의 전성기는 프로농구 출범 이전 농구대잔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프로농구가 막을 올린 1997년 허재는 만 32세였다.
그래도 허재는 KBL의 레전드로 기억된다. 외국인선수가 득세하던 시절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기량으로 농구 팬의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1997-1998 챔피언결정전 MVP는 '농구 대통령'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유산이다.
허재의 소속팀 부산 기아가 이상민-추승균-조성원 3인방과 조니 맥도웰이 이끌던 대전 현대에 3승4패로 졌지만 허재가 남긴 강렬한 인상은 챔피언결정전 MVP 수상으로 이어졌다.
2019-2020시즌 정규리그 MVP는 허훈과 김종규의 각축전이었다. 팀 성적에서는 김종규가 크게 앞섰다. 해당 시즌의 가장 가치있는 선수를 의미하는 MVP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팀 성적이 배제될 수는 없다. DB를 끌어올린 김종규도 충분히 수상 자격이 있었다.
허훈은 실력 이상의 가치를 선보였다. 특유의 긍정적인 자세와 스타 기질은 코트를 빛냈다. 흥행이 간절한 KBL에게 허훈의 2019-2020시즌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물론, 실력도 MVP를 수상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허훈은 시상식을 마치고 KBL을 통해 "아버지는 플레이오프 때 MVP를 받았다. 그것도 MVP라고 생각해서 부자지간이 같이 받아 뜻깊고 기분이 좋다"며 "많은 분께서 제 플레이를 보고 좋아해주셨다. 그 부분이 MVP를 받을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생각한다. 내년에는 더 좋은 모습,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