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모성 배반→처벌… 韓 영화가 답습한 여성 캐릭터들
② 식모·호스티스→전문직… 韓 영화 속 여성의 직업 변천사
③ 1970년대 영화에 여성 간첩 서사가 계속 나온 이유
④ '사적'(史的) 다큐로 재탄생, 여성 감독 다큐의 가능성 <계속>
그는 한국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 탄생 시기를 1980년대 중반으로 두고 2020년 현재까지 여성 다큐 감독은 매우 많은데도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 씨는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질료로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서 "카메라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감독이나 촬영자가)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다"라고 짚었다. 여성 감독의 다큐멘터리나 여성주의 다큐멘터리를 두고는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적으로' 푼다는 일차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관습적인 주류의 이야기에 어떻게 균열을 내어 나-우리-보통 사람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때 전면에 내세우는 게 여성주의"라고 전했다.
여성 감독이 만든 한국의 다큐멘터리는 다른 점이 있는 것일까. 독재 정권이 오래 유지되는 가운데, 다큐멘터리는 '미디어에서 말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고, 자연스럽게 사회 참여적인 성격을 갖추게 됐다. 고발적인 성격을 지닌 진보적이고 현장성 있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안에 '여성'은 없었다. 젠더 이슈는 지워지거나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다른 다큐멘터리를 위해 여성들은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여성영상제작집단 바리터를 시작으로 보임, 여성 다큐멘터리 작가 모임, 움, 연분홍치마 같은 단체와 집단이 생겨 한국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축을 구성했고, 현재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여성 다큐 감독과 제작자도 적지 않다. '여성영화'를 상영하고 나눌 수 있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탄생은 또 다른 차원을 열기도 했다.
이씨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 사적(私的)으로만 보는 건 이상한 프레임"이라며 노동사, 가족사, 시대사로 분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버블 패밀리'(감독 마민지, 2018), '옵티그래프'(감독 이원우, 2017), '개의 역사'(감독 김보람, 2017) 세 작품은 "노동사, 가족사, 시대사를 다 넘나들면서 다루고 있다"라며 "감독들이 역사-기억-나라는 존재를 고민해 자기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개인의 이야기라고만 매도하고 폄하하기에는 너무나 풍성한 층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버블 패밀리'는 도시 개발과 부동산 투기의 거품이 한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는 내용이다. 이 씨는 "한국에서 부동산이 갖는 의미를 가족사로 담고, 그게 '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라며 "감독의 삶 속에서 역사의 한 현장이 흘러갔다는 점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라고 말했다.
'옵티그래프'는 CIA 전신인 O.S.S 요원으로 활동하던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 인물의 '특출함'을 강조해 위인처럼 표현하지 않는다는 차별점이 있다. 이 씨는 "할아버지가 경험했다는 공간을 직접 가 보고 경험하는 방식"이라며 "나열된 정보를 직접 찾아보고, 그게 내 안에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역사 쓰기'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개의 역사'에 관해 "고유한 다수의 이야기가 역사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되고, 곧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걸 대단히 흥미롭게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라며 "누군가를 영웅화하지 않으면서, 대중이 주목하지 않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 모으는 것, 이것이 바로 '새로운 역사 쓰기'로서의 여성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