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가 31일 비밀 보존기한 30년이 지나 공개한 외교문서(1577권, 24만여 쪽) 가운데 우리 측 메모에 따르면 당시 우노 소스케 외상은 1989년 4월 1일 일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최호중 장관에게 이 같은 입장을 타진했다.
우노 외상은 “만약 한국 측에 있어서 천황폐하 및 황후 폐하의 방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했다고 판단된다면, 일본 정부로서는 예견 가능한 장래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천황폐하의 최초의 해외 방문으로서 방한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조정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노 대통령 방일시 대통령으로부터 이야기가 있을 경우 그러한 취지로 답변함과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발표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편 천황폐하의 방한에 관해서 한국 내에서 미묘한 상황도 있을 것이란 것도 잘 알고 있으므로 이 점 충분히 고려하여 은밀히 답변을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 회담은 이듬해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 등 양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우리 정부도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을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1989년 6월 주일대사관은 노 대통령의 방일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왕의 방한을 간접적으로 연계할 것을 건의했다.
일본 내에서도 같은 해 8월 외상 기자회견에서 관련 질문이 나오는 등 일왕의 방한설이 거론됐다.
하지만 아키히토 일왕의 방한은 해외 첫 방문으로서는 물론 재임 기간 내내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전두환 군사독재를 종식한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일제 및 과거사 청산 요구가 커지는 ‘미묘한 상황’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의 방일 이듬해인 1991년 8월에는 한일 역사갈등의 상징적 장면 가운데 하나인 고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일본군 위안부 증언도 나왔다.
일본도 1990년부터 거품경제 붕괴 여파로 20년 이상 장기 경제침체가 시작되며 보수 우경화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방한은 불발됐지만 아키히토 일왕은 노 대통령과의 회담 환영만찬에서 한일 과거사에 대해 ‘통석(痛惜)의 염(念)’이라는 다소 진전된 언급을 했다.
강제병합과 식민통치의 원흉인 선대 히로히토 일왕이 6년 전 전두환 대통령 방일시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는 건 참으로 유감’이라고 했던 것보다는 나아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 조차도 사전조율 과정에서 “(우리 측이) 대통령 방일시 신(新) 천황이 한일 양국의 과거사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하고 명쾌한 언명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고 일측은 외무대신으로서 충분히 검토하겠다고 언급”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통석’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조차 잘 쓰이지 않고, 뜻 자체도 사죄보다는 애석이나 애통의 의미가 강해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됐다.
다만 아키히토 일왕은 ‘백제 무령왕 자손’ 발언 등으로 한국과의 연을 언급했고,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때는 ‘한반도에 지대한 고통을 주었다는 깊은 슬픔’ 같은 사과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한편 올해 공개된 문서에는 △우루과이라운드협상 △미국 무역통상법 Super 301조 협의 △재사할린동포 귀환 문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의 협의체제 수립 △동구권 국가와의 국교수립 관련 문서 등이 포함됐다고 외교부는 설명했다.
공개된 문서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누구나 열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