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도 뭔가 이상하다고만 여겼던 '제사 풍경'이 영감을 줬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의식을 준비하면서는 여성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갖다 썼지만, 정작 제사에서 여성을 병풍 취급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여자들은 절을 안 하냐고 물으니 "여자니까 못하는 거야"라는 답을 들었다고.
'이장'은 아버지 묘 이장을 위해 흩어져 지낸 오 남매가 오랜만에 모이며 세기말적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하는 이야기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노컷뉴스 사옥에서 정승오 감독을 만나 '이장'이 시작된 출발점과 주인공 오 남매의 탄생기를 들었다.
◇ 제사 때, 누군가는 차별받고 있었다
'이장'은 정승오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2016년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부터, '순환소수', '오래달리기'까지 연달아 단편 작업을 하고 나니 긴 영화를 찍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아픈 엄마를 보러 병문안 가는 네 자매의 이야기를 담은 '새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네 자매의 부모가 죽고 난 뒤에는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까?' 하는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정 감독은 "제 가족의 삶도 세밀하게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제사 기억이 소환됐다"라며 "제가 당시에도 좀 이상하게 느꼈던 게 있다. 어렸을 때 제사 지낼 때, 이게 누군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미 있는 의식인데, 그걸 준비하고 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차별받고 있다는 기억이 있더라"라고 설명했다.
"준비는 다 여자들이 했는데 절을 할 때는 병풍처럼 서 있고 또 끝나고 나면 정리는 다 여자들이 하더라고요. 이런 모습을 보고 당시 제가 아버지한테 여쭤본 것 같아요. 사촌 누나들, 고모들, 할머니는 왜 절하지 않냐고. 그때 '여자니까 못하는 거야'라는 얘기를 하셨어요. 절 못하는 이유가 여자라는 이유만 있다 보니까 그게 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 부분을) 새삼 깊이 생각해 보게 됐어요. '가족 내 여성에게 편중된 차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아요."
'이장'에는 아버지 묘 이장 건으로 갑자기 한 자리에 뭉치게 된 오 남매가 나온다. 혜영(장리우 분), 금옥(이선희 분), 금희(공민정 분), 혜연(윤금선아 분), 승락(곽민규 분). 첫째 딸과 넷째 딸, 둘째-셋째 딸이 짝꿍처럼 이름의 일부를 공유하는 게 재미있어서 혹시 여기에 얽힌 비밀이 있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다소 뜻밖이었다. 당연히 있을 거라고 기대한 '규칙'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 남매라는 틀을 아내 형제들로부터 가져왔다는 정 감독은 이름 역시 동의를 얻고 그대로 썼다고 전했다. 본인도 이름을 짓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는 정 감독은 "작명에도 차별이 존재하는 거다. 막내만 승 자 돌림이었다. 대부분 돌림자는 여성한테는 안 준다. 족보에서 집안의 대를 쉽게 알 수 있게 돌림자를 쓰는 거니까. 아무튼 혜영, 금옥, 금희, 혜연에게 어떤 패턴이나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작명소 가서 주는 거 받아왔다' 이러는 거다. 저도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라고 밝혔다.
정 감독은 "저는 영화 인물을 구성할 때 주변 인물들을 많이 가져오는 것 같다. 그대로 가져온다기보다는, 제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걸 합치는 방식으로 인물을 만든달까"라고 덧붙였다. 극중에 꽤 규모가 있는 '오 남매'를 끌어들인 건 정 감독의 취향이었다. 그는 외아들이었지만 어머니 집은 12남매 대가족이었다. 외갓집을 가면서 어릴 적부터 식구 많은 집안의 복작거리는 분위기를 좋아하고 거기에 매료됐단다.
꽤 조용해 침묵이 익숙했던 집과 달리 외갓집에는 사람이 많았다. 한 명씩만 말을 해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러 가지 얘기를 저는 되게 재미있게 들었다"라는 정 감독은 "사실 이런 캐릭터 구축에 가장 영향을 준 게 어머니였다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정 감독은 어머니가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를 싫어해 아버지와 자주 다퉜다고 전했다. 둘 다 경제 활동을 하는데 가사노동을 도맡아야 하는 것도, 친정아버지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것도, 정 감독의 어머니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정 감독은 "그땐 '둘이 안 싸웠으면 좋겠다' 요 정도 생각만 했는데, 그게(엄마 말이) 요목조목 다 맞는 말인 거다"라고 말했다.
'이장' 캐릭터를 세우면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는 답변에, 조심스레 질문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보여준 태도가 정 감독의 삶이나 창작 과정에 영향을 주었나, 라고. 그는 "35년 동안 한국 남자로 살며 성 역할을 교육받았고, 한국에서 가장 남성 중심적인 집단인 군대에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각을) 주입받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런 여러 가지가 섞인 채로 성장했던 것 같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어머니 저를 앉혀놓고 여성의 인권이라든지, 여성주의 교육을 하신 건 아니다. 다만 직관적으로 느낀 걸 (제게) 표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집안의 남자로서 어때야 한다'고 교육하셨고, 어머니도 거기에 일정 부분 동의하시면서도 가족 내에서 자기 위치나 삶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계속 목소리를 내신 것 같다. 그런 게 무의식적으로 제 안에 들어온 것 같다"라고 밝혔다.
남자 두 명이 있는 가부장적인 가정 안에서 자기의 사적인 공간을 분리하고, '개인의 삶'을 보존하고 싶었던 어머니는 그러나 머릿속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다고. 정 감독은 "어떤 부분에선 한계가 있었다. '자식 때문에 산다'는 거니까. 어머니는 제가 열네 살 때부터 '네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나갈 거야'라고 말씀하셨다"라고 부연했다.
"이 영화를 작업하면서 어머니의 부분들과 아버지의 부분들을 생각했어요. 자연스럽게 확장되더라고요. 저희 아버지도 가부장적인 시스템 안에서 태어나 살아왔고, 저희 세대보다 훨씬 더 (가부장제를) 강력하게 주입받으면서 성장했을 테죠. 그러니 너무나 당연한 거죠, 가장으로서 내가 책임져야 하고 뭔가 이끌어야 하고 권위를 지켜야 하는 게.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가 탁 들어오면서 많은 혼란을 느꼈을 거라고 봐요, 아버지도. 40~50년 동안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시스템이 가족 내에서 붕괴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기니, 오히려 더 권위적으로 밀어붙이는 걸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땐 그런 생각을 못 했지만, 저희 집이 해체된 다음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