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영화예술아카데미 주관으로 제45회 세자르영화제가 열렸다. 영화제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감독상에 '장교와 스파이'(An Officer and a Spy) 로만 폴란스키의 이름이 불리자, 한 여성 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치스럽다"라며 시상식장을 퇴장했다.
올해 1월 국내에도 개봉한 외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감독 셀린 샴마)에서 주인공 엘로이즈 역을 맡은 배우 아델 아에넬이었다. 셀린 샴마 감독과 또 다른 주연 배우 노에미 메랑도 함께 퇴장했다.
아델 아에넬은 지난해 11월, 10대 시절 수차례 성추행당했다고 크리스토프 뤼지아 감독을 정식 고소해 프랑스의 '미투'(#Me_Too, '나도 말한다'라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밝히는 것) 운동을 재점화한 인물이다. 아델 아에넬은 시상식 도중 퇴장하면서 로만 폴란스키의 수상이 부당하다는 점을 몸소 알렸고, 많은 이들이 '#merciadelehaenel'(메르시 아델 아에넬)이라는 해시태그로 그의 행동을 지지했다.
'피아니스트', '올리버 트위스트', '러시 아워 3', '대학살의 신' 등을 만든 로만 폴란스키는 골든글로브 시상식 감독상, 세자르영화제 작품상,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등 유수의 상을 탄 거장 감독이다. 동시에 아동 성범죄 전력으로 악명 높다.
로만 폴란스키는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당시 13살이던 미성년자 모델에게 술을 먹이고 성관계를 맺어 성추행과 강간 등 6개 혐의로 기소됐고, 이듬해 LA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로만 폴란스키는 곧바로 항소한 후 가석방 상태에서 프랑스로 이동해 도피 생활을 했다.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피아니스트'로 감독상을 탔지만, 도망자 신세였던 그는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번 세자르영화제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장교와 스파이'가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르자 거센 비판이 나온 이유다. 여성·인권단체는 로만 폴란스키 수상 반대 시위를 벌였고, 프랭크 리에스터 문화부 장관은 폴란스키에게 상을 주면 좋지 않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프랑스 영화인 200여 명도 후보 선정에 관한 해명이 필요하다며 성명을 발표했다. 후보 선정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고 주장했던 프랑스 영화예술 아카데미 측은 이 같은 거센 항의 끝에 위원진 전원이 사퇴한 바 있다.
이 같은 반발 여론에도 '장교와 스파이'는 세자르영화제에서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다 노미네이트를 기록했고, 감독상뿐 아니라 각색상, 의상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