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4관왕(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장편영화상)을 기록한 '기생충'을 제작한 바른손E&A 곽신애 대표 라운드 인터뷰가 열렸다.
곽 대표는 인터뷰 내내 '창작자' 봉준호를 향한 두터운 신뢰를 보여줬다. 동시에 '기생충'이라는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도 드러냈다. 곽 대표는 "대한민국 제작자라면, 봉준호 감독님이 백지 들고 와서 하자고 했어도 했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기생충'을 만약 낯선 신인 감독이 가져왔다고 해도 "저는 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답했다.
◇ 철저하게 준비하고, 스스로 '신뢰'를 만든 봉준호 감독
'기생충'은 부자 가족과 가난한 가족을 주인공으로 해 전 세계적인 문제인 빈부 격차를 신랄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다룬 작품이다. 배우, 제작진 모두가 힘을 모아 만들어 낸 결과물이지만, 각본을 쓰고 연출한 '봉준호'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만약 신인 감독이 지금의 '기생충' 시나리오를 가져왔다면 제작했겠냐는 질문이 나왔다. 곽 대표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저는 했다. 받아줄 만한 투자자를 찾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봉 감독을 향한 '제작자'로서의 시선도 솔직히 밝혔다. 곽 대표는 "대한민국 제작자라면 봉준호 감독님이 백지 들고 와서 하자고 했어도 했을 거다. 저 아니라 다른 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우리가 봤을 때 작품이 다들 어느 수준 이상이지 않나. 본인이 만든 신뢰가 있으니까 고민할 게 아니다"라고 전했다.
봉준호 감독이 하나의 권력이 되어가고 있지 않으냐는 물음에 곽 대표는 "권력은 잘 쓰면 좋은 거고, 휘두르면 나쁜데 봉 감독은 잘 쓴다. 저하고 일할 때도 프로듀서 고유의 영역은 저와 상의하지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 달라'고 한 적이 없다"라고 답했다.
'기생충' 촬영 당시 물에 잠기는 동네 세트를 만들 때, 봉 감독이 미술·연출·특수효과팀과 고민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도출한 것이 한 예다. 곽 대표는 "(전부) 만들면 얼마가 드니까 앞줄만 만들고 뒤는 CG로 하자, 이렇게 예산을 줄여준다. 돈을 쓰는 것, 손익분기점을 높이는 것의 부담을 너무 잘 안다"라고 설명했다.
"일단 사람이 너무 착해요. 보통 감독님을 착하다는 개념으로 별로 생각 안 하더라고요. '천재다!' 이런 식이지. (웃음) 상대방이 기분 상할 만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시지 않아요. 저랑 여정 씨랑 자주 하는 말이 '사람이 어떻게 저래?' 이건데, 나쁜 게 아니라 감탄해갖고 그래요. 여정 씨가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릴 때 '오늘도 배웁니다'라고 자주 표현하는데, 봉 감독과 일하면서 사람과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너무 많이 배우고 감동한다고 표현해요. (봉 감독은) 저한테만 특별히 그러시는 게 아니라 영화 스태프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정말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어요. 자존감을 건드리는 게 없고, 친절하고 친근하세요."
◇ 봉준호 그다음은 가능할까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인 미국에서, 과거 '변방'으로 여겨졌던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상 최초로 작품상을 포함한 4관왕을 기록한 것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101년 한국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할 것이다.
곽 대표는 이번 '오스카 레이스'를 치르면서 가장 뿌듯했던 것으로, 해외에서 한국영화의 '다음'(next)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기생충'을 보고 활발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우리 배우들에게도 되게 관심이 많아졌다. 우리 배우들뿐만 아니라 '한국에 누가 또 있지?' 그러기도 한다"라며 "'next는 누구냐' 하면서 다양한 분들을 언급하기도 하더라"라고 전했다.
'기생충'의 엄청난 성공은 '기생충'과 연결된 수많은 사람에게 대단한 커리어를 선물하기도 했다. 곽 대표는 "벼락출세라고 하지 않나. 제가 이렇게 국제적인 명성을 갖게 될 줄 알았으면 영어를 좀 잘해 놓을걸"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쓸 데가 없다. 어차피 제가 다음에 해야 하는 일은 원래 같이하고 싶었던 감독님들 (작품을) 디벨롭(발전)하는 건데 거기에 하나도 도움 안 된다"라고 말을 이었다.
그가 홍보팀에 '제발 그러지 말라'고 부탁한 것도 '기생충' 메인 프로듀서라는 경력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곽 대표는 "욕만 더 먹지 않을까? 감독님들의 고유한 세계가 중요하고, 각 창작자의 역량과 아이템이 중요한 거지. 제 세계에 감독들이 맞추는 게 아니니까"라고 밝혔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은 전 국민적인 '경사'로 지나갔다. 이제는 '봉준호 그다음'이 가능한지 물음이 나온다. 결국 '기생충'의 눈부신 성과에 가장 기여한 것은 봉준호라는 뛰어난 개인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도 뒤따른다.
봉 감독이 데뷔하던 20여 년 전보다 현재의 한국영화업계가 훨씬 더 경직되고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투자-배급-상영이 수직 결합된 소수의 메이저 기업 중심 구조가 굳어지면, 신선하고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힘을 받기 어려워지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곽 대표는 "투자배급사를 하나의 덩어리로만 떠올리면 안 풀리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라며 "어떤 면에서는 저보다 영화광인 사람이 투자사 안에도 많다고 본다. 제가 엄태화 감독이랑 ('가려진 시간') 할 때도 상대방이 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고, 보고 싶어 했다. 그런 사람들이 투자사에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감독이 재능 있다면 시장과 어떻게 조화 이룰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제 몫"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 '제작자' 곽신애의 '다음'
'기생충'을 만나기 전과 후, 곽 대표가 경험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2010년 바른손 영화산업부 본부장을 시작으로 바른손필름 대표이사를 거쳐 2015년부터 바른손E&A의 대표이사로 일하는 그는, 자기 일을 조금 더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곽 대표는 "영화 제작자라는 직업을 계속해도 될까에 관해서 되게 헷갈림이 많았다. 대표 프로듀서 두 명이 나가서 갑자기 제가 대표가 됐고, 열심히 하는데도 한 2년 동안 제작 들어간 작품이 없었다. '가려진 시간', '희생부활자' 둘 다 (흥행) 결과가 안 좋아서, 내가 제작자를 하면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싶더라"라며 "이번 것('기생충')은 감독님이 큰 역할을 하셔서 제가 묻어간 부분도 많지만, 이 영화를 주저앉히거나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그러니까 좀 더 해도 될 것 같다"라며 미소 지었다.
'기생충'을 마치고 나서 봉 감독과 '서로 좋은 작업이었다'라고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곽 대표에게 중요한 수확이다. 그러나 작품마다 상황이 다르고 그에 맞춰 새롭게 제안을 해야 하니, 이전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곽 대표는 "누가 표현을 그렇게 하던데, 제작자와 감독 사이를 보면 제작자가 프러포즈하는 입장인 것 같다. 누군가가 좋고 그 사람한테 반하면 '저랑 작품 합시다' 하는 건데, 그게 잘됐다면 (제 곁에) 좋은 감독님이 많을 텐데 잘 안 됐으니까 지금 별로 없지 않나"라고 부연했다.
곽 대표는 "영화라는 게 너무 다 달라서 이 작품의 교훈이 다음 작품에 적용되는 경우가 별로 없다"라며 "다 0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다만 자신과 작업할 때 과정이 좋았다면, 객관적인 조건이 조금 뒤처진다고 해도 '의리'와 '신뢰'를 바탕으로 좋은 감독, 스태프들과 인연을 계속할 수는 있겠다고 전했다.
물론 좋은 작품의 출발은 감독과 작가의 손에 달려 있다. 곽 대표는 "작품의 시나리오 완성도가 좋아질 때까지 끌어내는 것, 그 과정은 오롯이 감독과 작가의 몫이어서 그 부분만 풀리면 (제작은) 금방 간다. 쭉쭉쭉 간다"라며 '완성도 있고 재미있는 시나리오 뽑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다양한 작품이 (어떤) 시기마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기생충'은) 그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그게 또 동료들이나 후진들에게 자극이 되잖아요. 그런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물론 관객도 (영화) 완성도에 관해 고민을 해야 하지만, (창작자가) 미리부터 나를 기존의 틀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봐요. 제작자는 창작자들이 할 만한 불필요한 사전 검열을 풀어주는 역할이 제일 중요하고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