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8부(심재남 부장판사)는 18일 이른바 '메르스 80번 환자'였던 고(故) 김병훈씨의 배우자 배모(41)씨 등이 국가와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3억대 소송에서 "국가가 배씨와 자녀에게 각각 1200만원·80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김씨의 사망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부분적으로 인정했지만 병원들의 배상 책임은 없다고 판단해 해당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에 대하여 '메르스 1번 환자'와 관련해 평택성모병원의 역학조사를 부실하게 한 데 대한 책임을 인정해 원고들의 청구 일부를 인용한다"면서도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등 병원들에 대한 (원고 측)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소설 '살아야겠다'(김탁환 작가)의 실제모델이기도 한 김씨는 지난 2015년 6월 확진 판정을 받은 뒤 172일 만인 같은 해 11월 25일 숨져 세계에서 가장 오래 투병한 메르스 환자, 국내 '마지막 메르스 환자'로 알려졌다.
배씨 측은 김씨의 사망이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대응하지 못한 병원과 당국의 책임이라고 주장해왔다.
앞서 지난 2014년 림프종 진단을 받은 김씨는 삼성서울병원에서 골수이식 수술 후 '완전관해'(Complete Remission·암이 사라졌다는 뜻) 판정을 받고 같은 해 12월부터 2015년 5월까지 통원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5월 27일 삼성서울병원에서 '폐렴 추정' 진단을 받고 입원 차 사흘간 응급실에서 대기하던 중 소위 '슈퍼 전파자'로 불린 '메르스 14번 환자'를 통해 메르스에 감염됐다. '14번 환자'는 메르스 첫 확진자가 입원해있던 평택성모병원에서 2차 감염된 것으로 파악됐다.
김씨는 고열 등 메르스 의심 증상이 나타난 지 일주일이 지난 6월 7일에야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배씨 측은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14번 환자'에 대한 역학조사 및 격리조치 등을 취하지 않아 면역력이 취약한 김씨가 감염됐다고 봤다.
또 서울대병원에 대해선 입원 내내 메르스 양성·음성 반응을 오간 김씨가 '감염력은 없다'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격리상태를 유지해 기저질환 치료를 막은 책임이 있다고 봤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고 직후 배씨 측은 "법원의 판결이 예상보다 소극적이라 아쉽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배씨 측 변호인은 "이번에 재판부가 인정한 손해배상액은 국가의 '관리 부재'에 따른 비말에 의한 감염 접촉, 그 자체에 대한 위자료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에 대한 위자료 액수가 상당히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적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메르스와 림프종이라는 특이질환이 중첩된 사항에 대해 의료진들이 부득이한 결정으로 치료방법을 선택했고 그에 대해 과실이 없다는 판단이 아닐까 예상해본다"면서도 "최근 코로나19 같은 경우 정부에서 노출자와 확진자들의 노선을 공개해 일반 시민들도 대피할 수 있었는데 당시 그 정도는 아니어도 호흡기 질환자인 '14번 환자'와 '80번 환자'의 노선이 중첩되게 했던 건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병원들의 책임을 배제한 부분에 대해서도 "삼성서울병원에서 김씨가 림프종 환자임을 잘 알면서도 '14번 환자'와 김씨의 경로를 분리시키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켰던 점, 서울대병원에 대해서도 항암 치료를 적기에 못하게 했다는 점과 관련해 다시 한번 '의료 과실'에 대한 판단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며 항소를 고려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선고를 듣기 위해 아들인 김모(8)군을 데리고 직접 법정을 찾은 김씨의 부인, 배씨는 막막한 심경을 밝혔다.
배씨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는 '내가 이 나라의 사과를 받을 수 있을까. 국민으로서, 환자로서 보호받지 못했던 것에 대해 내가 영영 사과를 받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다"며 아들의 손을 꼭 쥔 채 눈물을 흘렸다.
이어 "어쩌면 2015년 받았어야 했던 사과"라며 "2020년이 되어도 이런 결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제가 이 사회에서 또 절망적인 2심과 3심을 기다려야 하나라는 마음에 사실..."이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