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맛 씁쓸한 유남규, 가슴 쓸어내린 전지희

韓 탁구 초유의 녹취 공방 사태 일단락

유남규 전 여자 탁구 대표팀 감독(왼쪽)과 전지희가 지난해 헝가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혼합 복식 경기를 마치고 악수를 나누는 모습. 오른쪽은 이상수.(사진=대한탁구협회)
한국 여자 탁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선수 사이에 일어난 종목 초유의 녹취 공방 갈등이 일단락됐다. 이미 유남규 전 대표팀 감독(삼성생명)이 자진 사퇴한 가운데 귀화 선수 전지희(포스코에너지)가 견책 징계를 받았다.

대한탁구협회는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스포츠공정위원회(위원장 이장호 변호사)를 열어 국가대표 상비군 전지희에 대한 징계 심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견책 징계를 내렸다.

협회는 "국가대표 선발 규정 제 6조(성실 의무 및 품위 유지)에 따르면 국가대표 선수는 국가를 대표하는 신분으로서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삼가하며 사회적 책임감과 도덕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면서 "그러나 전지희가 국가대표 지도자와 대화를 녹취하는 행위는 선수와 지도자와의 신뢰도를 깨뜨리는 행위"라고 징계 배경을 설명했다.

전지희는 지난해 대표팀 훈련 중 독대한 유 감독의 발언 내용을 동의 없이 녹음했다. 이후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며 녹취 내용의 일부를 협회에 제출하며 진정서를 냈다. 이에 유 감독은 지난해 11월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고, 12월 말 사표를 공식 제출해 지난달 수리됐다.

협회는 경기력향상위원회를 열어 둘 사이의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헸다. 협회는 "선수는 물론 지도자의 인권이 걸린 예민한 사안"이라면서 "대한체육회에 이 사안을 공정위를 통해 해결하는 방안을 건의했다"고 밝혔다.


여자 탁구 국가대표 전지희 선수가 1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스포츠 공정위원회에 유남규 전 감독과 갈등에 관련한 내용을 소명하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서울=연합뉴스)
결국 공정위는 전지희에 대해 가장 가벼운 징계인 견책을 결정했다. 당초 공정위는 전지희에 대해 6개월 선수 자격 정지 중징계를 검토했다. 6개월 징계면 전지희는 오는 7월 도쿄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논의 과정에서 징계 수위가 낮아졌다. 공정위는 "전지희가 우리나라 국적을 취득하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동메달, 2017년 하계유니버시아드 금메달 등 그동안의 국위 선양에 이바지한 점과 유 감독에게 진정 어린 사과를 하고, 유 감독 역시 전지희에 대해 선처를 요청한 점 등을 고려해 징계를 감경했다"고 설명했다.

전지희는 공정위 하루 전인 11일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유 감독의 소속팀 삼성생명 체육관을 찾았다. 소속팀 김형석 포스코에너지 감독도 동행했다. 이 자리에서 전지희는 "그동안 오해가 있었다"면서 "녹음을 한 부분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유 감독에게 사과했다. 협회는 이같은 내용을 양 측으로부터 확인하고 공정위에 알렸다.

사태가 일단락됐지만 한국 여자 탁구의 현실에 대한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전지희를 비롯한 일부 베테랑 선수들이 감독의 지도 방식에 반발해 전복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몰래 한 녹취'에 대한 여론의 역풍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인 모양새가 됐다.

전지희와 의견을 함께 한 선수들은 서효원(한국마사회), 양하은(포스코에너지) 등이다. 유 감독이 지난해 3월 부임하기 전까지 거의 붙박이로 태극마크를 달았던 선수들이다. 그러나 유 감독이 베테랑들에 대한 배려 없이 여자 대표팀 무한 경쟁을 선언하면서 이들의 불만이 커졌고, 결국 녹취 사태까지 이르게 됐다는 게 탁구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실제로 전지희는 지난달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 올림픽 최종 예선에 나서지 못했다.

유 감독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여자 대표팀의 국제 경쟁력이 떨어졌다"면서 "그런데도 일부 선수들은 '나는 무조건 대표팀에서 뛴다'는 다소 안이한 태도를 보여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긍정적인 경쟁 구도가 생기면서 탁구 신동 신유빈(대한항공 입단 예정) 등 후배들도 국제대회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자평했다.

유남규 전 여자탁구 국가대표 감독이 12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스포츠 공정위원회에 전지희 선수와 갈등에 관련한 내용을 소명하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서울=연합뉴스)
물론 대표팀 선수들을 이끌어야 할 유 감독도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유 감독의 발언에는 선수의 사기를 꺾거나 소속팀과 관련해 차별적인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 감독은 "선수를 끌고 가려면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면서 "더 훈련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방식"이라고 항변했지만 어쨌든 전지희 등 선수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공정위의 결정에 대해 일단 당사자들은 따른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완전히 감정을 털어낸 것은 아니다. 유 감독은 "그나마 명예를 회복한 것 같다"면서도 "그러나 이번 사태로 대표팀에서 빠진 것은 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대승적인 차원에서 전지희의 사과를 받고 선수 생명이 끝나는 것까진 원치 않았지만 공정위 하루 전에야 찾아온 걸 보면 진정성에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시원섭섭하다"고 입맛을 다셨다.

전지희 측은 견책 징계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을 아끼는 모양새다. 김형석 감독은 "유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놓은 것은 안타깝지만 다행히 늦게나마 오해가 풀렸다"면서 "전지희도 마음 고생을 많이 했지만 어쨌든 동의 없이 녹음을 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 감독은 "이번 사태를 모든 탁구인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흐지부지 끝나면 앞으로 어떤 지도자가 선수들을 제대로 가르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동의 없이 지도자의 발언을 녹음하는 데 대한 (징계 등) 강력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이날 "향후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지도자와 선수 윤리 강령 등을 제정하는 것을 권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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