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존경하는 양희은 선생께서 '거리의 만찬'에서 하차하신 과정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제가 이어받을 수 없는 법이다. '거리의 만찬'의 가치와 명성에 누가 될 수 없기에 어제 제작진께 사의를 표했지만, 오늘 여러분께 확정지어 알리게 됐다. 앞으로 '거리의 만찬'으로 인해 세상이 더욱 밝고 아름답게 되기를 기도하겠다"라고 전했다.
김용민은 2012년 총선에 입후보했을 때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를 강간해서 죽이자고 하는 등 심각한 수준의 여성혐오 발언이 뒤늦게 알려진 바 있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잘못됐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을 내보냈고, 지난해에는 엄연히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버닝썬 사태'에서 화제성만을 가져와 '버닝선대인'이라는 부적절한 코너명을 지어 물의를 빚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이슈를 주로 다루는, 전원 여성 MC가 진행하는 시사 토크쇼 '거리의 만찬'에 김용민 기용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던 이유다. 가장 논란이 됐던 김용민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했으니 이제 끝인 걸까?
◇ 프로그램의 핵심 정체성과 차별점 스스로 포기
2018년 7월 2부작 파일럿으로 시작한 '거리의 만찬'은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진 MC들이 '현장'이 있는 거리로 나가 그동안 충분히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그램이었다. 이야기 나누고 나서는 의미 있는 한 끼를 함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포맷이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미디어에 의한 성차별 실태조사'(2017년 진행)에 따르면, 시사 프로그램 출연자 중 여성은 10.6%에 그쳤다. 남녀 진행자 비율은 9대1이었다. '남성 중심적' 방송가에서 시사 프로그램은 여성에게 특히 충분한 공간을 내주지 않았다. 세 명의 MC를 전부 여성으로 한 '거리의 만찬'은 시작부터 공고한 방송가 관행에 균열을 낸 프로그램이었다.
KTX 여성 승무원 해고 사태, 임신 중단, 초등학교 내 성평등 교육, 스쿨 미투(#Me_Too, '나도 말한다'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밝히는 것), 고(故) 장자연 사건,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 등 젠더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개인에게 맡겨진 간병 문제, 안전 사고가 빈번한 위험한 노동 환경, 다문화 정치인, 공익 제보자들의 힘겨운 싸움 등을 다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덕에 시청자 호평이 뒤따랐다.
가장 의문인 점은, KBS 스스로 이 같은 성취를 지우려 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의 핵심 정체성이자 차별점이고, 출연자와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낸 부분을 '빼고' 간다니. 기존 MC들이 법적·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들 셋의 조합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고, MC들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시청자들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KBS는 지난 2018년 11월 방송사 최초로 성평등센터를 열어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것뿐 아니라 성평등 조직문화 구현을 위한 제도 개선을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양승동 사장은 개소식에 참석해 "KBS 구성원들의 젠더 감수성을 높여 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했다. 그건 개소식 자리에 어울리는 '구색 맞추기식' 발언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 KBS 측 입장과 달랐던 사실들
시청자들 사이에서 반발 여론이 크게 일고, 이틀 만에 현 MC 교체를 반대하는 청원 동의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섰지만 KBS는 이날 오전까지도 'MC 교체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5일 미디어오늘과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KBS 관계자들은 기존 MC들과 하차 관련해 원활히 소통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기존 MC들의 반응은 제작진과 온도차가 컸다. 양희은은 이날 인스타그램에 직접 글을 써 "'거리의 만찬' 우리 여자 셋은 MC 자리에서 잘렸다!"라고 밝혔다. 박미선도 지난달 21일 인스타그램에 "오래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인데 아쉽지만 조촐하게 셋이 쫑파티했네요"라는 글을 올렸다.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쉽다는 댓글에, 박미선은 "짤린 거 맞지? ㅋㅋㅋ"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시즌 2는 시즌 1과 달리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현장에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라는 KBS발 홍보 문구에도 오류가 있다. 2018년 5월 파일럿 첫 방송에서 KTX 여성 승무원 해고 투쟁 천막을 찾은 것을 비롯해 정규방송이 된 후에도 세 MC들은 성평등 교욱이 진행되는 초등학교 교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지는 서울 톨게이트 등 다양한 현장을 누볐다.
후반부에 스튜디오 촬영이 늘어났으나, 이미 시즌 1에서도 선보인 것을 그대로 하면서 '시즌 1과 달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이 점을 여러 차례 질문했으나 KBS 측은 '제작진에게 프로그램 소개를 받을 때 그렇게 전달받았다'며 '12일 기자간담회에서 제작진이 정확한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답했을 뿐이다.
◇ 왜 아무도 이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나
풀리지 않는 강한 의문은 또 있다. '거리의 만찬' 제작진을 비롯해 KBS 내 어느 누구도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하는 점이다. 이날 저녁 나온 '거리의 만찬' 제작진 보도자료 내용에서도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이번 결정이 애초 '거리의 만찬'이 가지고 있던 고유성과 장점을 퇴행시키는 결정이었다는 인정이 없고, 어떤 과정으로 새 MC를 선정했는지, 기존 MC들과 이별하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연유는 무엇인지도 나타나 있지 않다.
"시청률 경쟁을 비롯한 대내외적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저희 프로그램에도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제작진은 오랜 고심 끝에 자체적인 개편안을 마련했다"고 하지만, 시청자들은 오히려 깊이 우려하고 거세게 반발했다. 제작진의 바람이나 기대와 반대로.
다시 한번 묻고 싶다. '거리의 만찬' 제작진은 왜 논란이 될 만한 인물을 MC에 앉히려고 했는지. 그 과정에서 대내외적으로 어떤 의견 수렴 과정과 검증을 거쳤는지. MC 교체와 관련해 왜 기존 MC들과 말이 다른지.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예견'하지도 못했고, 논란이 커지고 나서도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었는지 '스스로 깨닫거나 시정하려고' 하기보다는 외부 반발에 뒤늦게 움직였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이 먼저 나서서 MC 교체 반대 청원을 올리지 않았다면, 김용민이 먼저 사의를 표하지 않았다면, 시청자위원회가 긴급 특별위원회를 소집해 강력한 우려를 표하지 않았다면… '거리의 만찬' 시즌 2는 그대로 가지 않았을까. 예정된 기자간담회에서는 '우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해보겠다'라는 장밋빛 전망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이런 일이 실현되지 않은 게 이번 사태의 유일하게 다행스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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