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11년 지났는데…철거민 DNA '막무가내 채취'

2009년 참사 이후 5번째 "DNA 채취해야" 통보
흉악범죄 재발 막자면서…용산참사·쌍용차파업에 적용
"과도한 채취" 지적 수용한 경찰·헌법재판소…검찰은 여전
검찰 "관련 기준대로 채취 통보 결정" 설명
전문가들 "채취 통보는 검찰의 선택…잠재적 범죄자 취급 멈춰야"

용산 참사 당시 현장 모습 (사진=자료사진)
"귀하는 디엔에이(DNA) 감식시료 채취대상자로 2020년 1월23일까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판과로 출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지난 18일 용산참사 생존 철거민 A씨는 휴대전화 문자를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009년 참사 이후 검찰에서 온 5번째 DNA 채취 통보였다.

철거민 5명과 경찰 기동대 1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 이후 11년이 지났지만,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을 향한 사정 당국의 '잠재적 범죄자' 취급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에(규명위)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공판부는 지난 18일 용산참사 생존 철거민 일부에게 'DNA 채취를 위해 오는 23일까지 검찰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2011년과 2014년, 2015년, 2017년에 DNA 채취 통보를 했다. 이번 통보는 직전 통보(2017년 8월) 이후 2년 5개월 만이다.

◇흉악범죄 재발 방지하려 만들었는데…용산참사·쌍용차 파업에 적용

수사기관의 DNA 채취는 일명 'DNA법'을 토대로 이뤄진다. 지난 2008년 조두순, 2009년 강호순 사건 등 흉악 범죄가 연달아 터지면서 범인을 조기 검거하고 재범을 막아야 한다는 각계 요구에 만들어진 법으로 지난 2010년 7월부터 시행됐다.

DNA법은 방화·실화, 약취·유인, 절도·강도, 폭력행위, 강간·추행, 성폭력, 살인 등 총 11개 혐의 구속 피의자에게 적용된다. 문제는 수사 기관이 △주거침입 △퇴거불응 △재물손괴 등을 '폭력행위' 범주에 넣으면서 일반 집회·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과도한 DNA 채취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실제 용산참사 철거민과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도 이런 논리로 DNA 채취를 요구받았다. 한 번 채취한 DNA는 무죄 판결이 나거나 대상자가 사망할 때까지 데이터베이스(DB)에 보관된다.

◇경찰·헌재 "과도한 채취" 지적 수용했는데…검찰은 묵묵부답


인권단체 등 각계에서 과도한 채취라는 비판이 나오자, 경찰은 지난 2017년 집회 시위 사범에 대한 DNA 채취를 중단했다. 폭넓은 DNA 채취가 인권침해라는 비판을 수용한 것이다.

헌법재판소도 채취 대상자의 불복·의견표명 절차가 마련되지 않은 점을 이유로 지난 2018년 DNA법 일부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재발 방지'라는 입법 취지를 고려해 '재범 위험성이 없는 피의자'까지 DNA를 채취하도록 한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소수의견도 있었다.

이후 DNA법은 국회에서 지난해 말 개정돼 지난 21일부터 시행됐다. 이에따라 DNA 채취에 불복한 대상자가 서면으로 의견진술할 기회를 부여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검찰은 법 시행 불과 사흘 전인 지난 18일 용산참사 철거민들에게 DNA 채취를 재차 통보한 것이다.

법이 개정 직전에 대규모 DNA 채취에 나선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는 가운데 검찰은 구체적인 통보 규모 등에 함구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관련 기준에 따라 DNA 채취 여부를 판단해 용산참사 철거민 12명에게 통보했다"며 "철거민들이 채취 부동의 결정서를 보내왔다. 이를 검토해서 영장 청구 절차를 밟을지를 결정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전문가들 "검찰, 무분별한 잠재적 범죄자 취급 멈춰야"

전문가들은 '범죄 중대성'과 '재범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은 검찰의 일방적인 채취 통보가 부적절하다고 입을 모았다. 연쇄 살인이나 흉악 범죄 등을 계기로 만들어진 법을 이유로 국가 폭력에 희생된 용산참사 철거민까지 10년 넘도록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이상희 변호사는 "유사 범죄를 다시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면 DNA 채취를 하면 안 된다. 그게 입법 취지"라면서 "검찰이 철거민들에게 재범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절차를 밟은 것 자체가 문제다"고 지적했다.

조지훈 변호사(법무법인 다산)도 "DNA법은 제정할 때부터 인권침해 논란이 많았다"며 "중대한 범죄에 대해 재발 위험이 높을 때만 채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 변호사는 "법조문을 보면 채취를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할 수 있다'라고 나온다"고 꼬집었다. DNA 채취가 의무 사항이 아닌 만큼, 이번 통보는 검찰의 '취사 선택'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 변호사는 "전체 DNA 채취 중 영장 발부까지 간 것은 0.5%밖에 안 된다"며 "재범 위험성이 있든 없든 검찰이 통보한 대상자 대부분이 채취에 동의해 이뤄졌다는 뜻이다. 법을 집행하는 검찰이 너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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