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영화 매체에서 흑백 영상이 지닌 특별한 효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화평론가 이안은 29일 CBS노컷뉴스에 "컬러 화면은 우리가 보는 세상을 현실 그대로 재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반면 흑백 화면은 빛과 어둠의 정도 차를 통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흑백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다 능동적인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다. 그 연장선상에서 컬러 영화로 먼저 소개된 '기생충'은 흑백판을 통해 어떠한 의미를 더할 수 있을까.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기생충'처럼 극단적인 계급 문제를 다룬 작품은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흑백 화면은 그러한 영화 성격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며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사회 비판적인 시선이 많이 담긴 영화인 만큼 흑백으로 내놔도 그 의미가 증폭되면 증폭됐지 반감되지 않는다"고 봤다.
'기생충'에 앞서 봉준호 감독이 '마더'(2009) 흑백판을 내놓은 것이나, 치열한 계급투쟁을 SF장르로 탁월하게 묘사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흑백 버전이 나온 데도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이안은 "'기생충'이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계급투쟁을 처절하게 그린 만큼 극단적인 명암을 필요로 한다고 감독들이 판단했을 수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기생충'만 봐도 흑백 화면은 반지하와 지하라는 밑바닥 세계 명암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 세계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컬러 화면이 주는, 의도치 않은 밝고 아름다운 요소를 흑백 화면으로 제거할 수 있는 셈이다."
흥행한 영화의 흑백판은 마케팅 차원에서도 특별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오동진은 "현재 미국 내 '기생충' 상영관이 확대되는 추세에서 이른바 '디렉터스컷'(감독판)과 비슷한 맥락인 흑백판은 새로운 마케팅 요소로 활용될 수 있다"며 "음원 시대에도 CD나 LP를 찾는 층이 있는 것처럼, 모든 영화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복고 느낌처럼 뭔가 특별한 요소가 흑백 영화에는 있다"고 말했다.
감독 개인의 취향도 자기 작품을 흑백판으로 낼지 말지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안은 "봉 감독의 경우 고전 영화를 향한 커다란 애정을 지닌 창작자"라며 "흑백 영화 시대에 대한 향수, 오마주(존경)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동진 역시 "명감독이라면 자신이 염두에 둔 의미가 살아나지 않을 경우 단 한 커트라도 선택하지 않는다"며 "컬러를 빼더라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느낌과 의미를 살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흑백판을 선보이는 것"이라고 봤다.
무엇보다 흑백 영화는 컬러 영화 이전 시대까지를 포괄하는 보편성을 상징한다는 데서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안은 "가난과 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계급투쟁은 시대와 장소,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범역사적"이라며 "'기생충' 흑백판은 특정 시대 환경을 재현한 컬러판의 한계를 넘어, 이러한 투쟁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진리로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