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하는 배구는 끝났다. 이제는 듣는 배구의 시대가 열렸다.
만원 관중이 찾은 지난 16일의 서울 장충체육관. GS칼텍스와 현대건설이 맞붙은 장충체육관은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대륙별 예선을 마친 한국 여자배구의 ‘에이스’ 김연경(엑자시바시)을 포함한 4156명이 관중석을 가득 채웠다.
장충체육관을 뜨겁게 달군 배구 열기 속에는 15명의 시각 장애인, 그리고 이들에게 배구를 눈이 아닌 귀로 즐길 수 있게 해준 한 남자도 있었다. 이들이 있어 V-리그는 2005년 출범 이래 소화한 그 어떤 경기보다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2005년 출범 이후 처음으로 이날 15명의 시각 장애인을 경기장에 초청해 ‘눈’이 아닌 ‘귀’로 배구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들을 위한 특별한 준비도 있었다. 소준일 아나운서가 15명의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전담 중계를 맡아 눈이 아닌 귀로 즐기는 배구를 지원했다.
요즘은 스포츠를 ‘오감’으로 즐기는 시대다. 하지만 오감 중에서도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는 재미가 가장 먼저로 꼽힌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직접 경기장을 가지 않아도 TV나 휴대전화, 태블릿을 통해 전달되는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포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동안 시각장애인에게는 ‘직접 관람’은 흥미가 있어도 쉽게 도전할 수 없는 ‘벽’과 다르지 않았다. 특히 최근 배구의 인기가 크게 상승하고 있지만 V-리그는 축구와 야구, 농구와 달리 단 한 번도 연맹 차원의 시각장애인 초청 행사가 없었다.
시각장애인 초청 행사 후 CBS노컷뉴스와 만난 장경민 KOVO 홍보팀장은 “최근 배구의 인기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이번 시즌에는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사회공헌이라는 키워드로 장애인, 그중에서도 시각장애인을 초청해 그분들을 위한 중계를 해보자는 의견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사실 KOVO의 시각장애인 초청 이벤트는 지난해 11월부터 준비한 결과물이다. 초청된 시각 장애인의 의견을 반영해 이동이 가까운 장충체육관에서 최근 인기가 뜨거운 여자배구를 관람하기로 한 것이다.
장 팀장은 “시끌벅적한 경기장을 경험하고 만족해 하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야구와 축구, 농구는 음성 중계를 경험했다고 하는데 배구의 만족감이 특히 더 컸다는 소감을 들었다. 야외 종목과 달리 실내에서 음성 중계와 현장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만족감이 배가 됐다는 평가였다”고 만족도 높았던 시각장애인 초청 이벤트의 성공 후기를 소개했다.
이날 현장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을 맡았던 소준일 아나운서에게도 여느 경기와 달랐던 특별한 소감을 들었다.
2012년부터 현장을 누비며 다양한 경험을 했던 소 아나운서는 “배구를 처음 접하는 분도 있다고 들어서 내 입은 닫고 최대한 경기장의 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면서 “하지만 오신 분들이 구체적인 경기 상황을 전달해 달라는 요청을 하셔서 내 생각도 편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처음 하는 음성 중계인 탓에 기존 TV 중계와는 환경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소 아나운서는 경기장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경기 정보 확인을 위한 노트북 한 대와 음성 중계를 위한 마이크 하나가 전부인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다.
“해설자 없이 혼자 음성 중계를 소화하느라 3세트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중계에만 오롯이 시간을 보냈다”는 소 아나운서는 “혼자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설하는 분도 함께했다면 더 좋은 중계를 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다. TV중계라면 광고가 나가는 시간에 조금은 쉴 수도 있지만 음성 중계는 광고 시간이나 타임아웃 때도 쉴 새 없이 정보를 전달해야 했다. 스스로 100%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경기 끝나고 잘 들었다고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활짝 웃었다.
KOVO는 두 달 가까이 준비해 V-리그 최초로 실행에 옮긴 시각장애인 음성 중계의 반응이 좋았던 만큼 앞으로 해설위원과 아나운서가 참여하는 오디오 중계도 준비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보다 더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V-리그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배구팬에게 받은 큰 사랑을 나눌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