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른아이입니다"…만 18세 '집' 떠나야 하는 청소년들

현행 아동복지법상 보호시설 청소년들, 만 18세 되면 시설 '퇴소'
퇴소할 때 지원금 제공하지만…자립 준비돼 있지 않은 청소년들이 대다수
전문가들 "'자립 지원체계' 재정비해야…퇴소 청소년 관리하는 전담인력 필요"
"자립정착금 분할 지급·보호종료 예정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보강 검토해야"

설을 맞아 사람들은 집으로 향하지만, 외려 집을 떠나야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아동 양육시설, 공동생활가정과 같은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만 18세 청소년들이다.

현행 아동복지법 제16조는 보호 대상 아동의 나이가 만 18세에 달하면 아동의 보호조치를 종료하거나 시설에서 퇴소하도록 하고 있다. 매해 2천여명의 청소년들이 '집'을 떠나 홀로서기를 한다. 이들은 집단생활에서 벗어나 독립한다는 설렘도 있지만 사회에 '내던져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CBS 노컷뉴스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서울의 한 아동양육시설(보호시설)에서 보호 아동들이 명절 맞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독자 제공)
◇ 고교 3년은 시설과의 '이별 준비기'…만 18세에 자립 요구받는 보호시설 청소년들

다음 달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이민호(18·가명)군과 김지석(18·가명)군은 오는 1월과 2월, 20년 가까이 지낸 아동 양육시설(보호시설)을 떠난다. 아동복지법상 보호시설에서 퇴소해야 하는 '만 18세'가 됐기 때문이다. 이번 겨울, 동기들 대부분이 공장이나 사무직 등에 취직해 시설을 떠나면서 5명만 남았다.

퇴소를 앞둔 심경을 묻자 민호군은 "솔직히 말해서 무섭다"며 입을 뗐다. 그는 "만 18세에 사회에 내던져지기엔 늑대들이 많아요, 노리는 사람들도 많고…사건·사고 대처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민호군은 대학 진학 대신 취직을 택했다. 고등학교 3년은 시설과의 이별을 서서히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주차장, 편의점, 전단지 알바, 호텔 서빙. 안 해본 알바가 없다.

민호군은 시설 사회복지사가 LH 전세 임대주택 제도를 알려준 덕분에 다행히 집을 계약했지만, 어깨가 무겁다. 정부 지원금 9천여만원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6년여간은 마냥 놀고만 있을 수 없다, 돈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래 다른 친구들처럼 비슷하게 살고 싶은 것이 소박한 꿈이지만 그에게는 어른의 삶이 펼쳐져 있다.

취업을 택한 민호군과는 달리 배우를 꿈꾸는 지석군은 새학기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한다.

"퇴소 뒤 경제적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한 친구들이 많아요. 하지만 속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정말 이루고 싶은 '꿈'은 따로 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은 말그대로 꿈에 그치는게 슬프죠. 저도 주변에선 혼자 먹고살려면 기술을 배우라고 권유했지만, 다른 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지 않아 어렵게 대학 진학을 결정했어요"

오는 첫 학기 학비와 기숙사 비용은 시설의 지원과 국가장학금 등으로 충당했지만 앞으로가 걱정이다. 지석군은 "시설에서 나가면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로 급여를 받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 벌이가 있어 급여 지원이 끊길 수가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사립재단의 장학금 제도를 알아볼 계획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보호종결아동의 자립증진을 위한 정책개선 연구' 결과, 보호종결 아동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45.8%)이 가장 많았다. 절반 이상(50.6%)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의 생계급여, 의료수급자로 나타났다. 월 근로소득도 50만원 미만이 29.9%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사진=자료사진)
◇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세상으로…'홀로서기'하는 아이들

정부는 보호시설 청소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만 15세가 지나면 자립 계획서를 쓰도록 하지만 청소년기에 구체적인 '자립' 계획을 내놓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민호군은 "돈을 얼마나 모을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등을 계획서에 쓰도록 했지만 무의미했다"고 말했다. 업무 과중에 시달리는 사회복지사들도 이들을 세세하게 지도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다.

퇴소에 앞서 외부 강사를 초빙해 경제 교육 등을 하는 시설도 있지만, 청소년들이 혼자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온전히 제공하긴 힘들다.

"당장 공과금 내는 방법을 모르는 친구들도 많아요. 시설에서 자립 교육을 받지만, 실질적으로 내용이 와닿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막막해요"

지자체에서 주는 자립정착금 500만원과 디딤씨앗통장 저축 금액 등을 받지만, 이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한 청소년들도 많다. 민호군은 "경제 관념이 잡혀있지 않아 탕진하는 친구들도 여럿 봤다"며 "분할 지급 방식 등이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가전제품 비용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물품 지원 제도'가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왔다.

'보호종료 아동을 위한 커뮤니티케어센터'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산책을 하고있다. (사진=최유정씨 제공)
◇ "우리 자립할 수 있을까요?"


보호 종료 청소년들은 만 18세에 시설을 떠나지만 민법상 만 19세 미만은 미성년자다. 청소년들은 "퇴소 뒤 성인도, 아이도 아닌 애매한 시기가 있다"고 말했다. 시설 소속일 때는 시설 대표가 이들의 법정대리인이지만 퇴소 뒤 친권자도, 후견인도 없는 이들은 갖은 어려움을 겪는다. 보험이나 휴대폰, 인터넷 등 통신사 가입조차도 쉽지 않다.

민호군은 "보호시설에서 퇴소한 친구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법정대리인이 없어 경찰 조사를 받고 보험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속수무책이었다"며 "사회로 나오긴 해도 미성년자라 법적으로 혼자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제동이 많아 답답하다"고 전했다.

지자체 사정에 따라 자립정착금을 늦게 받는 청소년들도 많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연구 결과, 수개월에서 심지어는 퇴소 1년 뒤에 정착금을 받은 청소년들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보호종료 청소년들은 "집을 계약할 때, 가계약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착금이 늦게 나와 난처해하는 친구들을 여럿 봤다"고 말했다.

퇴소한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는 사후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설마다 지정된 자립 전담 요원은 퇴소자들의 상황을 확인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매해 시설을 졸업하는 청소년들은 끊이지 않는데 자립 전담 요원의 수는 시설당 1~2명에 멈춰있다. 복지사 1명이 100여명의 퇴소자를 관리해야 하는 곳도 있다. 전화, SNS 등을 통해 현황을 조사하지만, 퇴소자가 연락을 끊으면 이들이 곤경에 처해있어도 시설에선 알 길이 없다.

(사진=자료사진)
◇ 전문가들 "'공급자 중심'의 지원 방식에서 벗어나야"

이른 나이에 자립을 권유받는 보호시설 청소년들은 퇴소 뒤 경제적 어려움 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보건복지부가 올해부터 자립수당 30만원을 지급하는 대상을 보호종료 2년에서 3년 이내 아동으로 넓혔지만, 이들의 '자립 분투기'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 지원체계'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부 시·도 지역에서 자립통합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중앙정부 차원의 통합적 자립 지원체계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호종료 청소년 자립 지원 특별법' 제정은 국회에서 몇 차례 논의됐을 뿐 진전되지는 않았다.

보호종료 아동을 위한 커뮤니티케어센터 김충헌 센터장은 "물리적 자립뿐 아니라 '의지적 자립'도 중요하다"면서 "청소년들이 신뢰를 회복하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도록 일종의 '가정' 역할을 하는 자립 지원센터들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정익중 교수는 "퇴소 청소년을 지원하는 전담 인력에 대한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현재 보호 종료 청소년이 퇴소한 때 자립정착금을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을 두고는 '공급자가 편한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청소년들이 가장 필요한 때에 지원금을 주는 게 제일 좋다"며 "하지만 퇴소 뒤 이들에 대한 사례 관리가 잘되지 않다 보니 퇴소 시점에 돈을 일괄 지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컨드 찬스', 두 번째 기회를 보호 종료 청소년에게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퇴소한 뒤 경제적 형편 등 상황이 나빠진 청년을 시설에서 다시 받아들여 지원해 더 큰 사회적 비용을 막자는 취지다.

한편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하반기에 현행 아동복지법에 따른 보호 종료 아동 조처가 차별 요소가 있는지에 대한 입장을 밝힐 계획이다.

'보호종료 아동을 위한 커뮤니티케어센터'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웃고있다. (사진=최유정씨 제공)
◇ "자립 성공해 시설 후배는 마음 놓고 꿈꿀 수 있게 할래요"

"설에 우리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다들 집에 있기는 싫다 보니 함께 모여 근황을 이야기해요"

민호군과 지석군은 이번 설을 퇴소한 시설 동기들과 함께 보낸다. 시설을 졸업한 대선배들과의 동문회도 정기적으로 열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가족이 된 것이다. 퇴소 뒤의 고충을 잘 아는 이들은 "자립에 성공해 후배들의 홀로서기를 돕고 싶다"고 밝혔다.

지석군은 배우의 꿈을 이뤄 예체능인을 꿈꾸는 시설 청소년들을 지원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시설에서 지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선입견이 있는 사람들도 마주했다"며 "보호시설 청소년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내용의 연극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취업을 택한 민호군은 "돈을 많이 벌어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정착하고 싶다"며 "나중에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싶다"고 평범한 꿈을 내비쳤다. 시설에서 만난 '엄마', 수녀님들과의 인연도 이어간다. 그는 "수녀님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부산에 보호시설 청소년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는데 저번에도 찾아뵀다"며 "다들 연로하신데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며 소망을 빌었다.

태어나자마자 보호시설에 맡겨져 18세가 되던 해 퇴소한 최유정(21)씨는 보호 종료 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민간 센터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퇴소와 동시에 취직해 바쁘게 살았던 최씨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이번 설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아빠'인 센터 선생님 댁을 찾았어요. 보호시설에서 자란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도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는 복지사가 되고 싶어요"

정부가 제도와 현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는 사이, 보호 종료 청소년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버팀목이 돼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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