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첫 공판에서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가 이 내용을 언급했을 때만 해도 "재판 진행이나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지만, 삼성그룹은 곧바로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달 17일 네 번째 공판에서 정 부장판사는 "준법감시제도가 실효적으로 운영되면 양형조건으로 고려할 수 있다"며 "피고인과 삼성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형사소송법상 전문심리위원 제도를 통해 점검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정 부장판사가 언급한 미국 연방 양형기준은 실제로 이 부회장의 사례에 참고할 수 있는 규정일까. 이번 논란은 정 부장판사가 다른 재판에서도 꾸준히 실천해온 치료적·회복적 사법의 일환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
◇ 미국 연방 양형기준 8장, 이재용 개인엔 '적용 불가'
"미국 연방 양형기준 제8장과 그에 따라 미국 대기업들이 시행하는 실효적 감시제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 재판 때 정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과 변호인단에 위와 같이 안내했다. 그러나 CBS노컷뉴스가 해당 양형기준을 살펴본 결과 이 부회장 개인에 대해서는 참고 용도로도 쓰기 어려운 내용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 연방 양형기준 8장의 제목은 'SENTENCING OF ORGANIZATIONS'다. 개인(자연인)이 아닌 조직(법인)을 대상으로 한다. 이는 해당 장의 서문 첫 줄과 제1원칙에도 명시돼 있다. 조직(Organization)이란 '개인이 아닌 모든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법에서 개인과 법인을 분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1991년 제8장을 도입해 개인과 법인에 대한 양형을 분리한 취지를 고려하면, 기업의 돈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 '가해자 임원'에 대해서는 더욱 해당 장이 적용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미국 연방 양형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다이아나 머피 판사는 2002년 '아이오와 로 리뷰'에 기고한 논문에서 그 차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개인에 대한 형벌이 처벌(punishment)과 무력화·자격 박탈(incapacitation)을 목적으로 한다면, 법인에 대한 형벌은 원상회복(restitution)과 벌금(fines)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형량을 정할 때도 개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중한 범죄인지'가 가장 먼저 고려되지만, 법인에 대해서는 '원상회복이 되었는지'가 먼저 등장한다. 즉 미국 연방 양형기준 제8장은 감옥에 구속할 수 없는 법인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계산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미국에서 최고경영자(CEO) 등 개인의 경제범죄에 대한 형량이 매우 높아지면서 법인에 대한 벌금 역시 크게 늘어 곧장 파산에 이르게 되는 상황을 방지하려는 취지이기도 하다.
미국 연방 양형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존 스티어 판사는 ※'사베인-옥슬리법'의 도입과 양형 문제에 관해 쓴 글에서 "개인인 피고인에 대한 형량이 늘어나면 기업에 대한 벌금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양형위원회는 '실효적인 준법감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선량한 법인(good corporate citizens)에 대해서는 벌금액을 낮춰주자는 건의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미국 양형기준 적용하면 이재용 오히려 '가중처벌' 해야
정 부장판사의 견해대로 미국 연방 양형기준을 이재용 피고인 개인에 대해 참고해볼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감형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가중처벌'의 근거가 되는 조항이 있다.
정 부장판사가 언급한 양형기준은 기소된 법인이 '범죄행위가 있던 시점에 실효적으로 작동하는 준법감시·윤리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벌금 수위를 정하는 과실점수(culpability score) 3점을 깎아준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조항의 뒷부분에는 '조직의 고위 임원이 범죄에 가담하거나 범죄행위를 묵인한 경우 앞의 감경 사유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임원이 범죄에 가담하거나 묵인한 사태가 발생했다면 '실효적인' 준법감시·윤리 프로그램이 운영됐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종업원이 5000명 이상인 조직에서 고위 임원이 범죄에 가담하거나 범죄를 용인한 경우는 과실점수 5점을 가중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이 부회장과 함께 삼성전자 법인도 함께 기소됐다면 이 부회장의 불법행위를 통제하지 못한 회사 역시 막대한 벌금형을 받게 될 수 있었던 셈이다.
특히 해당 범죄 행위가 '시장에 대한 위협'이나 '공공 부패'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양형기준에 의해 산정한 벌금 액수를 추가로 상향할 수도 있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에서 인정한 이 부회장의 혐의인 '자신의 승계를 위해 계열사 합병을 단행하고 이 과정에서 도움을 얻으려 대통령 측근에게 회삿돈을 이용해 뇌물을 준 범죄행위'가 해당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피고인을 삼성전자로 가정하고 해당 양형기준을 적용해보더라도 △CEO의 범죄 가담 △증거인멸(사법방해) △범행 당시 준법감시제도 미비 △선거직 공무원에 대한 뇌물 등으로 기본 벌금의 최대 4배까지 부과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가 이 부회장의 뇌물 공여액 86억 원(약 750만 달러)을 미국 뇌물죄의 양벌규정과 양형기준 제8장에 따라 계산한 결과 벌금액이 약 3000만 달러, 우리 돈 350억 원에 달했다.(이 부분은 삼성전자가 기소됐을 때 미국 연방 양형기준을 고려해 계산해 본 '가상의 상황'을 전제로 한 결과임을 밝혀둔다.)
첫 재판 이후 삼성이 재빠르게 설치한 준법감시위원회는 미국 연방 양형기준에 따르면 범죄행위 당시부터 작동하고 있었어야 감형요소로 반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치료적·회복적 사법의 일환에서 삼성의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감형요소로 고려할 수 있을까.
치료적·회복적 사법은 기존의 형사사법 체계가 보여온 엄벌주의, 응보주의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또 '국가 대 범죄자(피고인)'의 구도에서 배제됐던 피해자와 지역사회 구성원 등 여러 이해관계자를 사건 해결 과정에 끌어들인다.
정준영 부장판사는 2013년 '저스티스'에 기고한 논문에서 "회복적 사법의 핵심은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 피해자의 용서, 상호 간 화해를 끌어내고 범죄에 의해 훼손된 관계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정 부장판사는 법원 내에서 누구보다 회복적 사법에 큰 관심을 두고 재판에 적용해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빚에 시달리다 자녀들을 살해하고 동반 자살하려던 엄마를 남은 어린 자녀 등을 고려해 보석 석방한 사례가 있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남성에 대해 3개월간 매일 귀가 시간과 음주 여부를 말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받아보고 1심의 실형을 파기하고 집행유예로 풀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적 사법의 관점에서도 삼성의 사후 준법감시위원회 설치가 곧 이재용 피고인의 반성을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진정한 '회복적' 관점이라면 횡령의 피해자인 삼성이 준법감시위원회를 마련할 것이 아니라 앞서 음주운전 사고를 낸 남성처럼 가해자인 이 부회장이 경영권을 반납하고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정 부장판사가 관심을 두고 살펴온 여러 회복적 사법의 사례가 우리 사회의 불안정한 시스템이 야기하거나 누구든 내몰릴 수 있는 범죄였다면, 이 부회장의 사례는 다르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서 벌어진 범죄행위를 일반적인 몇몇 개인들 간의 형사 범죄처럼 취급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기업 총수의 횡령과 권력에 대한 뇌물은 그들이 아니면 저지를 수 없는 범죄이고 피해자는 해당 회사와 그 임직원, 주주들부터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국민들까지 광범위하다"며 "이 피해를 회복하려면 오히려 엄중한 처벌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베인-옥슬리법: 미국 역사상 최악의 회계 부정 사건으로 꼽히는 '엔론(Enron) 사태' 이후 2002년 만들어진 법. 미국 에너지 회사였던 엔론의 회계 부정으로 엔론이 파산한 것은 물론이고 감사인이었던 회계법인 아서 앤더슨(Arthur Anderson)까지 해체됐다. 이에 기업회계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담보하는 조항을 담고 최고 경영자(CEO)와 회계 책임자(CFO)에 대한 처벌을 대폭 강화한 법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