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해석의 여지라는 매력적인 요소는 어느 순간부터 창작자의 지나친 간섭으로 여겨지는 흐름을 낳았다. 그 사이 본의는 아니더라도 많은 역사물이 왜곡, 미화와 같은 구설에 휘말려 왔다. 그렇게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도 전에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한 역사물을 우리는 당장이라도 한두 편가량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5일 언론에 첫 공개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흥미롭게도 주류에서 벗어난 역사물 문법을 택함으로써 이러한 논란을 영리하게 피해가는 만듦새를 선보였다. 누가 봐도 명백히 알 만한 역사적 인물들에게 본명 아닌 가명을 붙여 영화적 상상력의 여지를 극대화한 덕이다.
다소 촌스럽다고도 여겨질 법한 이러한 문법은,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실제 역사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우리네 일상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물론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월 26일 벌어진 대통령 박정희 암살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40일간의 과정을 담고 있다.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은 미국 의회 청문회를 통해 자국에 들어선 독재정권의 실체를 고발한다. 그의 후속 폭로를 막기 위해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과 청와대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이 나서면서 최고 권력자 박통(이성민)을 향한 충성 경쟁은 극한을 향해 치닫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동명 원작 베스트셀러와 달리 각 캐릭터에 실명이 아닌 가명을 부여했다. 당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지닌 관객들은 '김규평=김재규' '박용각=김형욱' '곽상천=차지철' '전두혁=전두환'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박정희 역시 '박통' '각하' '프레지던트 박(President Park)' 등으로만 표현될 뿐 실명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선택은 현명했다. 비교적 가까운 역사에 해당하는 그 시절 일화가, 실제 벌어진 사건 외에는 관계자들 증언이나 풍문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사는 당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다는 데서 그 관점과 해석에 따라 큰 논란을 낳기 십상인데, 가명을 활용해 역사적 인물들의 실존성을 희석시킴으로써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는 대전제를 웅변하는 까닭이다.
이 영화에서 배우 이성민은 박통 캐릭터를 위해 귀 특수분장까지 하고, 배우 이희준은 경호실장 곽상천 연기를 위해 몸무게를 25㎏이나 늘렸다. 그만큼 이 영화는 실존인물에게 가명만 덧입혔을 뿐 외형은 실제를 오롯이 재현하는 데 힘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극중 비서실장 캐릭터 외형은 실제 당대 김계원 비서실장과 쉽게 겹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떠올리는 관객들이 대다수일 법하다. 김기춘 전 실장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 야욕을 드러낸 유신헌법을 만드는 데 큰 몫을 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영화의 현재성을 강화하는 장치로서 극중 비서실장 캐릭터는 제 몫을 다하는 셈이다.
이러한 효과는 영화 매체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의 가치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우리는 그 덕에 '남산의 부장들'이 전하는 과거사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경험에 보다 쉽게 동참할 수 있다. 보통 120분 내외로 주어진 시간 안에 다양한 상징을 응축시켜 뚜렷한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이 영화의 과제다. 그 답은 역사 속 '저들'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을 사는 '나'의 이야기에 있다.
'남산의 부장들' 서사의 방점은 '부당한 권력을 향한 일그러진 충성 경쟁의 말로' '생활·일상의 민주화'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이 영화 속 캐릭터들 사이 얽히고설킨 관계는 최고 권력자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여기면서도, 이를 비판 없이 수행하는 과정 안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빚어내며 나락으로 치닫는다. 그 안에는 우리네 복잡다단한 욕망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는 결국 '그렇다면 충성 경쟁의 열매를 따 먹는 최고 권력자는 무엇을 위해 욕망하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 영화는 시대가 지닌 구조적인 모순에 관한 통찰로까지 관객들을 인도하려 애쓴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는 진리에 성큼 다가선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다.
22일 개봉, 113분 상영,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