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뭘까요. 개념 자체가 추상적이고 그 안에서도 스펙트럼이 워낙 넓은 터라 누구는 보수고, 누구는 보수가 아니라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사전을 찾아보면, 생활환경이 변했을 때 삶의 방식이나 제도를 막 바꾸기보다는 애초 정해놨던 원칙대로 살자고 하는 태도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비교적 이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원래는 '한나라당', 그리고 '새누리당'이라는 정당에 한데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갈라진 건 대한민국 정치사에 유례없던 사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였습니다. 자, 시계를 3년 전으로 돌려 볼까요. 최서원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고 국정 곳곳에 개입했다는 충격적 소식이 전해진 뒤 서울 광화문광장은 촛불로 뒤덮였습니다. (최순실이라는 개명 전 이름을 쓰면 고소한다고 하니 부득이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자 박 전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던 보수정당, 즉 새누리당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여러 갈래로 찢어져 버렸습니다.
가장 눈에 띈 건 '비박계' 움직임이었습니다. 당내에서 박 전 대통령과 비교적 덜 친했던 그룹입니다. 상당수는 전임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웠죠. 이들은 '박근혜 게이트' 국정조사에 참여해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리고는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결의할 때 '찬성표'를 던진 뒤 우르르 탈당했습니다. 새누리당 당대표를 지냈던 김무성 의원과, 원내대표 출신 유승민 의원이 이를 주도했습니다.
반면 박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그래서 당의 주류를 형성했던 '친박계'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대통령을 탄핵하자는 데 있어서도 차마 찬성표를 던지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앞장서 비호하지도 못했던 게 대다수였지만 말입니다. 이들이 새누리당에 남아, 지금의 자유한국당으로 계승됐습니다. 그리고 친박계 중 몇몇 강경파는 "우리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며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따로 만든 정당이 바로 '우리공화당'입니다.
문제는 이런 분열의 결과가 썩 좋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보수 쪽 사람들은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모든 주요 선거에서 줄줄이 참패했거든요. 같은 지역구 안에서도 "내가 보수 후보야"라는 사람이 여러 명씩 출마하다 보니 지지층 표가 나뉘는 바람에, 1등을 놓친 경우가 많습니다. 전체적으론 훨씬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당장 한국당만 해도 적폐, 즉 오랫동안 쌓인 해로운 집단이라는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꼰대' 이미지도 여전하고요. 탄핵을 당하고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지만, 위기 때마다 리더를 교체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연명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수주의 원칙에 입각한 합리적인 주장을 내놔도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른바 '촛불 민심'을 내세운 문재인 대통령의 인기가 고공 행진을 이어가는 동안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지난해 '패스트트랙 정국'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반대하는 법이 국회에서 하나씩 통과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습니다. "좌파 독재"라고 소리치며 삭발과 단식, 국회를 둘러싼 시위까지 펼쳤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회의장 앞에 눕고 폭력 사태를 초래했다는 이유로 재판까지 받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아이고. 부끄럽고 서러워도 어쩌겠습니까. 애초에 쪽수가 부족했던 것을.
탄핵 뒤 탈당했던 사람들은 어떨까요. 개혁보수로 성공해보겠다는 게 이들의 당찬 포부였지만, 아직까진 뚜렷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르르 몰려왔던 이들 중 상당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우르르 돌아갔습니다. 김무성 전 대표마저도요. 이들이 만들었던 바른정당과 바른미래당, 모두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새로운보수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만들었는 데요. 소속 국회의원으로는 8명이 남았네요.
이런 가운데 향후 4년간 우리 국민을 대표할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이제 석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보수진영에는 지금 이 상태로 선거를 치를 경우 이번에도 좋은 성적을 내긴 어렵지 않겠냐는 위기감이 팽배한 데요. 판을 뒤집을 유일한 카드로 꼽히는 게 바로 오늘의 주제, 통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보수성향 시민사회단체나 학자, 때때로는 언론까지도 통합 쪽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입니다. 최근에는 그 기세를 몰아 '혁신통합추진위원회'라는 기구까지 만들었는데요. 일단 '통합 신당'을 별도로 만들어 한국당과 새보수당이 '헤쳐 모이는' 방식을 원칙으로 하기로 합의했답니다. (다만 우리공화당은 빠졌습니다)
탈당파, 그러니까 새보수당 쪽은 긴장감이 역력합니다. 설혹 한국당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통합이 진척될 경우 그동안 지켜왔던 명분도, 그리고 실리도 다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신자라는 낙인에 갖은 수모를 겪어가며 어렵게 지켜왔던 개혁보수의 동력이 식진 않을까, 하는 것도 걱정이고요. 무엇보다 탄핵에 대한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기도 쉽지가, 아니 정치적 양심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유승민 의원이 통합의 조건으로 던진 게 바로 '3대 원칙'입니다. 요새 뉴스에 맨날 나오는 개념이라 한 번쯤 들어는 보셨을 겁니다. 한국당이 ▲탄핵의 강 건너기 ▲개혁보수 ▲새로운 집 짓기 등을 수용해야 논의 전개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비유적 표현이라 해석이 조심스럽습니다만, 보통은 탄핵 입장을 묻지 말고 새로운 당을 만드는 방식으로 모이자는 요구로 풀이됩니다. 새보수당은 "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직접 이 3원칙을 받아들이겠다고 명확히 천명해야만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며 압박하고 있습니다.
한국당은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단 강경파 의원 몇몇은 거세게 반발합니다. 쬐그만한 정당, 우릴 배신하고 나간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끌려다니냐는 불만입니다. 그 의미도 불분명한 3원칙이라는 걸 무턱대고 수용했다가는 자칫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당장 조건을 받아들이거나 그걸 뛰어넘어 더 큰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으로 대응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일단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항변합니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엊그제 저한테 이렇게 말하더군요. "반대하는 사람들한테 한 번 물어봐주이소. 보수가 다시 살아나는 데 이것 말고 그럼 무슨 방법이 있냐고"라고 말입니다. 이 가운데 놓인 황 대표의 고심이 클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또 있습니다. 곧 귀국할 중도 성향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까지 통합 신당에 모셔오겠다는 게 이들의 원대한 계획 혹은 낙관적 기대인데요. 만에 하나 그렇게 될 경우 '도로 새누리당'을 넘어설 가능성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
자, 이런 통합 논의는 다음 달 10일 전후 어느 정도 확정될 전망입니다. 통합추진위원회 대빵인 박형준 교수, TV 토론프로그램에 패널로 많이 나와 친숙한 분이죠. 이 분에 따르면 총선 일정을 맞추기 위해 그전까지는 웬만한 작업을 끝내야 한답니다. 한 달도 안 남았네요. 결론이 어떻게 날까요. 통합이 정말로 될까요, 아니면 어그러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여기까지 다 읽으셨다면 댓글로 의견 좀 남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