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교수 가뭄' 앓는 미대생들…"순수예술 죽고 있다"

고려대 조형예술 전공 전임교수 1명뿐…학생들 "전임교원 충원하라"
'강사법 개정'과 맞물려 교육의 질 저하 우려…'강의요원' 등장하기도
"국내 미술대학 힘 잃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 감소할 수도"

(사진=고려대학교 홈페이지 갈무리)
서울 주요 대학 등 대학 내 순수예술 관련 전공 전임교수의 수가 학생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학생들은 대학이 '순수예술 죽이기'에 나섰다며 전임교수 충원 등을 학교에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안전하게 졸업하고 싶다' 대자보 걸고 교수 충원 요구하는 미대생들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학생들이 주축이 된 안전졸업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는 최근 교내에 '조형예술 전공 신임 교원을 충원해 달라'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였다. 디자인조형학부는 산업디자인 전공과 조형예술 전공으로 구성되는데 학생들의 비율은 2대1 정도인 반면 교수 비율은 7대1이다. 산업디자인 전공 교수가 7명, 조형예술 전공 교수는 1명이다. 한명뿐인 전공 교수마저도 2023년에 정년을 맞는다.

학생들은 "2020학번뿐만 아니라 교환학생을 다녀오거나 휴학 뒤 복학할 재학생들은 지도교수가 없는 상황에 놓일 것"이라며 "아직 신임 교수 채용이 불투명한데 교수가 없는 전공을 상상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현재까지 연세대, 홍익대, 이화여대 등 학생 200여명이 연서명했다.

이는 비단 고려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술대학 학생들 대부분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홍익대 동양화과는 학년 당 학생 수가 30명 정도로 모두 100명이 넘지만 전임교수는 1명에 그친다. 해당 전임교수도 정년퇴임을 2년 가량 앞둔 것으로 알려졌다. 판화과 등 다른 순수예술 전공도 학년 당 학생 수가 20~30명 내외지만 전공 전임교원은 1~2명 정도다.

◇부실한 교육·통폐합 위기…'순수예술 죽이기'로 이어져

대다수 학생들은 "전임교원이 부족해 커리큘럼 자체가 부실해지는 등 교육의 질이 많이 떨어진다"며 “많은 학생들이 본인 학과가 통폐합되지는 않을까 위기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학생 A씨는 "전공 전임 교수는 졸업 전시회 관련 수업만 담당하고 학기마다 선생님이 다르다 보니 그간의 작업을 설명하느라 학기 중 한 달을 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작품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데 호흡이 끊긴다, 학생들이 더 많은 작품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홍익대 미대 학생 B씨는 "전임교수가 줄어드는 만큼 충원되고 있지 않아 추가 채용이 없으면 전임교수가 아예 없어지는 순수예술 학과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전임교수 미달로 교수가 맡을 수 있는 강의 수가 제한되자 한 수업에 많은 학생들을 수용하는 '대형 강의'도 판을 치고 있다고 학생들은 입을 모았다.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학생들이 올린 대자보 글. (사진=고려대 정대후문 페이스북 갈무리)
◇'강의요원'까지 등장했지만…손 놓고 있는 교육당국

'전임교수 가뭄' 현상은 강사법 개정과 맞물려 학생들의 '교육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학생 C씨는 "(고려대 조형예술 전공의 경우) 전임교수가 한 명뿐인 상황에서 강사법 개정으로 강사 수도 줄어드는 추세"라며 "강사들은 여건상 다른 대학들에서도 수업을 하다 보니 학생들의 프로젝트에 온전히 관심을 갖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홍익대 미술대 학생 D씨는 "강사들만 자주 바뀌다 보니 필드(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게 학생들 입장에서는 아쉽다"며 정기적인 전임교원 채용을 촉구했다.

이에 대학에서는 순수예술 전공을 중심으로 '강의요원'들까지 등장했다. 강의자 명단에는 교수 이름이 올라가지만 실제 강의를 하는 건 대학원 박사과정생들이다. 홍대 예술학과 3학년 학생 E씨는 "강의 경험이 많지 않은 대학원생들이 대다수라 강의력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강의 평가를 할 때도 강의요원이 아니라 수업 개설자인 교수에 대한 평가를 하게 돼 있어서 수업 피드백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악화일로 속에서 학교 측과 교육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고려대는 조형예술 전공 전임교수 충원 문제와 관련해 "구성원들과 대화 중"이라며 "아직 충원이 결정된 바는 없다"고 밝혔다. 홍익대도 실용음악과를 신설하며 미술대 등 단과대 인원을 잠정 동결했다. 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 줄일 인원이 없어서 줄이지 않은 것"이라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강사법 개정 이후 교원·강사 등을 충원하는 데 예산 수십억원이 소요되지만 대학들 대부분 뾰족한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은 교원 미달 등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 학교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홍익대 미대 학생 D씨는 "학교 측에 충원을 요구하면 학교는 채용하려 했지만 교수 지원자들이 채용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취지의 답변만 내놓는다"며 "대학이 실리적인 효과, 근시적인 가치만을 좇으며 미술대학을 바라보고 있다"고 꼬집었다.

학생들은 "대학들은 아웃풋(결과)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전공을 지원하는 경향이 있다"며 "수십 년이 지나야 예술가 1~2명이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은 순수예술의 특성이 교육 현장에서 고려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순수예술 전공에 대한 대학의 '지원 축소'가 국내 순수예술, 나아가 순수학문 발전의 '지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계명대 회화과 장이규 교수는 "현재 교내외 재정 지원 부족, 불확실한 진로 등의 문제로 순수예술을 지망하지 않는 입시생이 늘어난 것도 문제"라며 "전임교수 미달 등 상황이 지속된다면 결국엔 국내 미술대학이 힘을 잃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순수예술 작가들이 줄어드는 등 순수예술의 위기를 맞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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