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재홍은 '해치지않아'를 준비하면서 참고한 작품으로 뜻밖의 이름을 말했다. 바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6)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등 3관왕을 차지한 화제작 '레버넌트'는 19세기 당시 회색곰에게 습격당해 간신히 살아난 사냥꾼 휴 글래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정형행동(이상행동)을 하는 북극곰 까만코와 대치하는 장면을 찍을 때 '레버넌트'를 참고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장르도, 전체적인 톤도 너무나 상반된 영화가 나와서 인터뷰 도중 작은 웃음이 터졌다. "곰이랑 (인간이) 싸우는 영화가 '레버넌트'밖에 없더라"라며 주인공 디카프리오에게 "존경한다"라고 한 안재홍의 덧붙임 덕에 다시 한번 폭소가 터졌다.
◇ '이게 될까?' 하는 의구심이 '되겠다!'는 확신이 되기까지
'해치지않아'에서 망하기 일보 직전인 동물원 동산파크 직원들은 하나씩 동물을 맡아 연기한다. 인수합병(M&A) 전문 변호사 자리를 위해 '동물원 정상화' 임무를 받고 온 새 원장 태수는 북극곰을, 동산파크의 수의사 소원(강소라 분)은 사자를, 동산파크의 이전 원장 서 원장(박영규 분)은 기린을, 사육사 건욱(김성오 분)과 해경(전여빈 분)은 고릴라와 나무늘보로 변신했다.
그래서 동물 탈은 중요했다. 웃음의 주 소재이면서도 너무 비현실적이어서는 안 됐다. 동물 탈이 어느 수준으로 나올 것인가. 배우뿐 아니라 제작진 역시 궁금해하는 부분이었다.
배우들이 입을 동물 수트는 촬영 중반부터 하나씩 도착했다. 안재홍은 "너무 재미있고 너무 달콤한 이 이야기 속에서 동물 탈이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것만큼 나와줘야 이야기가 성립될 텐데… 모두가 의구심을 가졌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라고 너스레를 떨어 웃음을 유발했다.
동물 탈이 도착했을 때 어떤지 보기 위해 스태프들이 몰려들었던 게 기억난다는 안재홍은 "고릴라 (탈을) 보고, 아! 되겠다. 이거 가능하겠다! 영화 속 관람객과 영화를 보는 관객까지 납득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라며 "그 탈들을 보면서 감독님께서 영화 속 관람객을 믿게 만들면서, (영화 밖) 관객들에게 웃음을 줄 선을 정확히 찾으신 것 같아서 전 그게 놀라웠다"라고 밝혔다.
'해치지않아'에서는 북극곰 탈에 물이 묻으려고 하는 순간에 아주 비싸다고 물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다급한 주문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건 실제였다. 극중 콜라 먹는 북극곰을 연기한 안재홍은 그 연기를 할 때 콜라를 부어선 안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게 정말 고가였다. 금액을 말씀드릴 순 없지만 고가의 털이라 젖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라며 콜라병 입구를 막거나 마시는 장면을 빠르게 커트하는 방식으로 촬영했다고 전했다.
감쪽같은 동물 옷이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인 티가 나면 현실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해치지않아' 배우들은 '미스터 고'(2013)에서 곰 역할을 했던 모션 감독의 도움을 받아 동작을 익혔다. 무거운 옷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는 "겨울에 해서 천만다행이다. 겨울에 했는데도 땀이 흠뻑 났다. 솜이불 같은, 미쉐린 타이어 같은 엄청난 옷을 입고 그 위에 털옷이 또 있었다. 한 동물당 탈 만드는 데만 3~4개월이 걸렸다. 회사가 정말 혼을 쏟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시야를 맞추는 것이었다. 안재홍은 "(눈구멍이 동물 옷의) 목에 달려 있었다"라며 "북극곰의 큰 움직임을 외워서 구현해야 한다는 게 어려웠다. 근데 저희 영화가 모션 디렉터들의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탈 안에 들어간 캐릭터의 마음이 더 잘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북극곰이 콜라를 따고 있지만, 사실 그 안의 태수가 딴다는 걸 관객분들은 알지 않나. 태수의 마음이 잘 보이길 바랐던 것 같다. 사자로 누워있는 소원의 마음, 나무늘보로 매달려 있는 해경의 마음도"라고 말했다.
◇ 눈앞에 없는 것을 상상하며 찍은 영화는 처음
태수는 후반부 실제 북극곰 까만코와 대치하는 상황을 맞는다. 말이 '대치'지, 위협당해 만신창이가 되는 건 오롯이 태수 몫이었다. 안재홍은 "제가 까만코와 대치하는 부분에서는 '레버넌트'를 참고했다. 곰이랑 싸우고 당하는 영화가 '레버넌트'밖에 없더라. 완전히 다른 느낌이지만"이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다.
'조작된 도시'(2017) 때 블루스크린 앞에서 차량 추격 장면을 찍은 적은 있어도, 실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찍은 건 처음이라는 안재홍은 "특히나 곰을 상상하는 게 처음이었다"라며 웃었다. 이어, "'레버넌트'에서 제가 참고한 게 뭐냐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보여준 공포감이다. 사실 제가 곰이랑 근처에 있어 볼 일이 없으니까, (영화 속) 디카프리오의 공포감을 잘 보려고 했다. 완전히 다른 성향의 영화와 캐릭터지만, 나름대로 또 다르게 해석해 보고 싶었다"라며 디카프리오에게 '존경한다'고 전했다.
안재홍은 "소라 씨는 사람 자체가 굉장히 기분 좋은 에너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원이랑 나오는 씬에서 에너지를 더 잘 주고받아 드라마틱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까. 저는 조류방사장 앞에서 태수랑 소원이가 서로 가치관으로 대립하는 장면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순풍 산부인과' 레전드 영상을 한참 보던 중에 '해치지않아' 시나리오를 받아서 박영규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황 대표 역의 박혁권과 비서 역의 서현우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안재홍은 "박혁권 선배님은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이다. 팬이다. 그래서 황 대표님 (역을) 하신다는 얘길 듣고 너무 좋았다. 완전히 새로운 악당이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현우 형도 그렇고 뭔가 예민한데 허술하고 귀여운 악당을 잘 만들어주셨다. 그 두 분이 저희 영화를 해 주셔서 영화가 더 풍성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라고 전했다.
레이첼이라는 고양이를 키우는 반려인인 안재홍은 '해치지않아'가 동물권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점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동물에 대해 어떻다고 말하는 건 조심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그는 "제가 이 영화를 촬영하고 개봉한다고 해서 '저는 동물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건 너무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라며 "감독님도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이제부터 이렇게 합시다'라고 하지 않는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요?' 하는 뉘앙스를 드리지. 전 이 영화를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재미있고 좋은 메시지까지 있어서"라고만 말했다.
안재홍은 오는 15일 개봉하는 '해치지않아' 외에도 차기작이 여럿 있다. 이제훈, 최우식, 박정민, 박해수와 함께 출연한 스릴러 '사냥의 시간'이 2월 개봉을 앞뒀고, 강하늘, 옹성우와 함께한 JTBC 여행 예능 '트래블러-아르헨티나' 역시 2월 15일 첫 방송을 시작한다.
'열일' 소감을 묻자 "너무 감사하다. 완전히 다른 매력을 가진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작품에 관해서는 "그건 2월에 말씀드리겠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해치지않아' 멤버들과 동반 출연한 SBS '런닝맨'이 이번주 일요일(12일)에 방송한다는 언급은 빼놓지 않았다. 명료하고 유쾌한 마무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