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은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장영실과 세종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다. 그동안 깊이 있게 다뤄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는 작품인 만큼 중요한 것은 캐스팅이었다. 장영실과 세종을 연기한 배우는 대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30년 넘게 긴 인연을 이어온 최민식과 한석규였다.
지난해 봄부터 작업에 참여한 허진호 감독은 '천문' 시나리오를 최민식과 한석규에게 동시에 주었고, 셋이 같이 만났다. 장영실과 세종 역할을 뚜렷하게 정하지 않았다. 작품을 두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배우들이 직접 정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 역을 맡아 그해 SBS 연기대상을 받은 한석규가 먼저 세종을 골랐다. 장영실은 최민식의 몫이었다.
작품의 두 축이 되는 주인공을 정하지 않고 제안한 데서, 두 사람을 향한 허 감독의 신뢰가 느껴졌다.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둘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라며 "바꿔서 했어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누가 어떤 역을 맡을지 정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주는 일은 드물지 않나. 그것도 주연급에게. 이런 과감한 결정의 이유가 궁금하다.
이 세종과 장영실에 관한 이야기에 (주인공) 두 사람을 누가 할까 생각했을 때, '조합'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민식-한석규라는 조합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가 세종을 하고 누가 장영실을 할 것이냐? 둘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이 배우들이 같이 작업을 해 보고 싶다는 얘기가 있었고, 사석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왔다. 쉬리 이후에 같이 못 해서 둘이 같이한다는 게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웃음) 시나리오를 던져놓고 만나서 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얘기를 했다. 처음 만나서 바로 얘기한 건 아니고, 5~6시간 정도? 4시간은 옛날 얘기를 하다가 '정말 언제쯤 얘기하려나' 할 때쯤에 서로 의견을 말하더라. (웃음)
바꿔서 했어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하다. 초반에 캐스팅됐을 때 한석규 배우가 장영실을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 번 세종을 해서. 근데 한석규 씨는 '뿌리깊은 나무'와 다른 세종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전과는 다른, 세종의 역할을 본 것이겠지. 되게 확신 있게 얘기했다. 자기가 한 번 했던 역할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 텐데도.
▶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를 설정할 때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음, 영화의 시작은 '왜'였다. (장영실은) 왜 내쳐졌을까. 세종은 신하들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어도 다시 중용하는데… 조말생(허준호 분) 같은 경우도 엄청나게 큰 잘못을 했어도 다시 썼고, (세종이) 그거로 회자가 많이 되지 않나. 황희 정승 같은 경우도 다시 쓰고. 그래서 끝까지 부려먹는다는 말도 나오고. (웃음) 그런데 영실은 왜 끝까지 안 쓰고 버려졌을까에 대한 질문이었다. 세종과 영실의 관계에 관해 아주 짧은 기록이지만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는 내용이 있다. 영실이 자격루를 개발했을 때 세종이 좋아했다는 게 표현돼 있다. 자격루는 대단한 발명품이었고, 장영실 역할이 컸다. 우리나라 시간을 처음 갖게 됐을 때도, 장영실이 만든 천문 기기 역할이 컸을 거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 이면에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했다.
▶ 장영실-세종 캐릭터와 그 관계에 관해 그림을 그릴 때 배우들이 의견을 낸 부분도 있나.
한석규 배우의 아이디어가 많이 있다. 둘이 같이 눕는다든지. 원래는 돌다리 같은 데를 건너면서 하는 대사였는데 앉고 싶다고 하더라. "감독님 앉게 해 주십시오" 했는데 또 "감독님, 저 눕고 싶습니다" 하더라. (웃음) 누울 만한 크기를 만들긴 뭐해서 근정전 후원에서 찍었다. 잘한 것 같다. 왕에겐 일상적인 공간이고. 둘의 관계를 보면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는 그런 느낌? (세종 입장에선) 자기 꿈을 (장영실의 기술로) 실현시켜주는 것도 있겠지만 친구이자 벗이었을 것 같다. 왕에게 친구가 있을 수 있겠나. 한석규 배우는 (장영실과) 친구가 되는 느낌을 가져가고 싶어 했다. 영실의 입장에서 봤을 땐 충신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면천(천민에서 벗어나게 함)해 준 윗사람이면서도 또 다른 관계가 형성되는 거다, 친구로서. 이 둘의 관계가 그냥 충신하곤 조금 다르다고 봤다. 그런 관계에서 '왜 버려졌을까' 이 부분에 영화적인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거기에는 시대 상황도 있었을 거다. 명나라는 아마 조선에서 가져온 천문 기기를 인정하지 않았을 거다. 지금으로 치면 핵무기나 핵기술 같은 느낌이라서.
세종이 가진 태도가 자주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여러 '기준'을 만든 왕이다. 한글은 물론이고 천문에 대한 간의를 만들었던 것도, 그 배경엔 애민(백성을 사랑하는) 사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세종의 존경할 만한 철학인 것 같다. 그런 인물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장영실은 관노에서 종 3품까지, 천민에서 고위 관료까지, 지금 우리가 아는 장영실의 위치까지 갈 수 있었던 성공 스토리가 되게 매력적이었고.
▶ 영화가 공개되고 나서 두 사람의 관계가 왕-신하의 충심을 넘어 연정으로 보인다는 반응도 꽤 나왔다. 로맨스 느낌이 많이 났다고 했는데 이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미인곡', '관동별곡'도 왕에 대한 사랑을 담은 것이지 않나. 그 시절은 임금에 대한 (신하의) 사랑이 대단했던 것 같다. '벗 아니냐'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고 하니 얼마나 (사이가) 대단했겠나. 그런 감정의 변화를 담았다. 처음에 만났고, 서로가 통했고, 그다음에 뭔가 이 사람의 능력을 봤고… 자격루를 만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정말 기뻐했다'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까. 그러고 나서야 (둘이 별을 보느라) 누울 수 있었을 것 같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전하 너무 잘하시옵니다", "고맙구나" 하는 장면에서 친해진 게 보이는 거다. (세종 처소에) 별 찍으면서는 이들의 관계가 완성된 걸 보여줬다고 봤다. 변해가는 걸 씬마다 넣었던 것 같다. 어떤 감정이 점프 되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가도록. "너무 잘하시옵니다", "고맙구나" 이건 애드리브다. (웃음)
▶ 애드리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화에 코믹한 요소도 포함됐다. 장영실과 세종 관계도 그렇고, 서운관의 조순생(김원해 분)-임효돈(임원희 분)은 아예 웃음을 담당하는 느낌이다.
(장영실과 세종이) 처음 둘이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게 그… 신데렐라 스토리이지 않나. (웃음) 그런 것들이 재미있고. 그걸 밝고 재미있게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장면 찍고 나서 우리 최민식 배우에게 "선배님, 제가 못 보던 모습이 나왔습니다" 했다. 장영실의 모습이 귀엽더라. (웃음) (첫 만남 때)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까, 여러 번 시켰는데 다리 저려서 넘어지지 않나. 그거 다 연기다. 몇 번을 찍었다. 최민식 배우의 귀여운 모습이 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