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대법원 판례는 "서훈은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재량권을 갖고 하는 '통치행위'이므로, 그에 앞선 추천 절차도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취지의 입장이었으나, 이런 기존 대법원 판례에 최초로 반기를 든 사례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11부(김동오·박재우·박해빈 부장판사)는 A씨가 "독립유공자 포상 추천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이와 같은 취지로 판결했다.
A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구금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며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자로 추천해달라고 국가보훈처에 2017년 10월 신청했다.
국가보훈처는 공적심사위원회 심의 결과 A씨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후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에서 서기로 근무했다는 이유로 추천을 거부했다.
A씨는 추천 거부 처분을 취소해 달라고 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는 각하됐다.
각하란 소송이나 청구가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그 주장 자체는 아예 판단하지 않고 재판 절차를 끝내는 결정이다.
그간 독립유공자 포상 추천 거부에 불복해 여러 차례 소송이 제기됐으나 각급 법원은 일관되게 이를 각하해 왔다.
우선 훈장 등을 수여하는 것은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행하는 '통치행위'이므로 법원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확립된 판례다.
통치행위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의 행위로 이를 법적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는 이론적 개념이다.
아울러 법원은 국가보훈처의 추천 거부 역시 대통령이 결정하기 위한 절차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국민의 권리·의무에 변화를 주는 '행정처분'이 아니라서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봐 왔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는 적어도 국가보훈처의 '추천 거부' 행위는 행정소송의 대상이 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보훈처의 행위 자체가 훈장을 수여할지 결정하지는 않지만, 추천을 거부함으로써 국무회의와 대통령의 판단을 받을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로 인해 독립유공자 지위를 인정받을 기회를 잃고 독립유공자법에 따른 보상을 받을 길도 원천적으로 차단되므로 이는 국민의 권리·의무에 영향을 미치는 공권력의 행사"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보훈처의 심의가 공정하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사법부의 '심사'가 이뤄질 필요성이 있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재판부는 "추천 거부가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공적심사위원회나 보훈처가 사실관계를 오해하거나 비례·평등의 원칙을 어기는 등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경우에도 신청한 사람이 이를 다툴 방법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의 영전(榮典) 수여 이전에 이뤄지는 심사가 공정한지 사법심사할 필요성이 있다"며 "위법한 심사가 이뤄질 경우 이를 다툴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헌법 정신에도 부합한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도 독립운동가 약산(若山) 김원봉의 서훈 여부를 두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벌어지는 등 정치적 지형에 따라 주장이 엇갈리는 경우도 종종 있는 만큼, 관련 법령을 기준 삼아 판단의 공정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재판부는 A씨의 사건을 각하하지 않고 주장에 대한 심리를 진행했다.
다만 A씨의 경우 아버지가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 서기로 근무해 행적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추천을 거부한 처분은 정당하다고 보고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