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장영실로 분한 최민식, 만약 세종 역이었다면?

[노컷 인터뷰] '천문' 장영실 역 최민식 ①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장영실 역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을 만났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내용이 나옵니다.

가장 최근 작품이 '침묵'(2017)이었으니 약 2년 만에 하는 언론 인터뷰였다.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민식은 "(이번 시간대가) 네 번째인가? 열심히 뛰고 있다"라며 웃었다. 최민식은 허진호 감독의 신작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에서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깊이 있게 다룬 한국 영화는 드물었다. 무엇보다 장영실과 그의 재능을 발견해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고 적극적으로 기용한 세종의 '관계성'에 주목한 영화는 '천문'이 처음이었다. 극중 장영실과 세종은 30년 넘게 연기라는 한길을 함께 걷는 선후배 최민식과 한석규가 나란히 맡았다. 영화 '쉬리' 이후 20년 만에 한 작품에서 만났기에, 두 사람의 재회를 향한 관심이 높았다.

최민식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뭔지 물었을 때도 "'석규랑 오래간만에 하니까 어땠나?'였다"라고 답했다. '천문'이라는 작품에 대한 애정만큼, 오랫동안 함께한 동료 한석규를 향한 믿음도 깊어 보였다. '천문'이 아니었더라도 한석규와 같이 출연하는 작품이라면 했을 거라고 단번에 말할 정도로. 허진호 감독이 장영실과 세종 역할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고 배우들끼리 정하라고 했다는 일화를 전하면서, 만약 자신이 세종을 연기했다면 지금 '천문' 안의 세종과는 확연히 다른 캐릭터가 나왔을 거라고 전했다.

◇ 정치 드라마도, 과학 드라마도 아닌 '관계'에 집중하는 '천문'

최민식은 '천문'으로 허진호 감독 작품에 처음 출연했다. 예전부터 사석에서 봤을 때 '언제 한 번 같이 작품 하자'라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마침내 함께 작업했다. 허 감독은 '천문' 시나리오를 주면서 '한석규 씨랑 같이했으면 좋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최민식은 바로 '콜' 했다.

시나리오도 마음에 들었다. 최민식은 "시나리오를 보니까 허테일이더라, 허테일. 허 감독이 한 디테일 하지 않나. '이야~ 요거 살짝 괜찮겠는데?' 싶었다. 그 관계에 집중하는 게. 이게 어떤 정치 드라마도 아니고 과학 드라마도 아니고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더라. '아, 그래서 석규하고 나한테 줬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허 감독은 누가 세종을 하고 누가 장영실을 할지를 전적으로 최민식-한석규 두 사람에게 맡겼다. 그때 한석규는 먼저 세종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최민식은 '형, 제가 세종 할게요'라고 한 한석규 말을 전하면서 "다르게 하고 싶다 이거다. 자식이~ 또 왕을 하겠다니. 내 팔자는 무슨 맨날 노비에서 벗어나질 않아"라고 말해 폭소를 유발했다.

그러면서 "제가 왕(세종)을 했으면 정남손이(김태우 분)는 죽었다. 모가지 날아갔다. ('천문' 속 세종은) 근정전 안에서 위협만 하지 않았나. 신구(영의정 역) 선생님 덕분에. 제가 했으면 (정남손) 모가지 날아갔다"라고 강조해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정남손은 '천문'에서 장영실의 존재를 못마땅해하며 명나라에 가장 사대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신하다.

지난달 26일 개봉한 영화 '천문'은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한석규 분)과 장영실(최민식 분)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 '여백' 많아 매력적이었던 장영실

한석규가 세종 역을 하고 싶다고 먼저 말한 일화를 재미있게 전했으나, 최민식은 "저는 좋았다. 장영실은 문헌에 기록된 게 적지 않나. 빈 곳이 많으니까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가 상상해 보자 했다"라고 말했다. "본인이 자유롭게 만들 여백이 얼마만큼 있는지, 그게 전체적인 작품과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판단"해 보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설명이다.

최민식은 과거 TV 강연으로 접했던 천재 로봇 과학자를 떠올리며 장영실을 해석했다. 자기가 만든 로봇을 작동시키면서 너무나 즐겁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감을 잡았다. 최민식은 "장영실은 몇백 년 전 세종 시대의 저런 사람 아니었을까. 아기 같고 순수하며 굉장히 비정치적인 인물"이라며 "(세종이 장영실을) 내관같이 항상 가까이 두고 얘기를 많이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그럼 그렇게가까이서 둘이 무슨 얘기를 했을까"라고 말했다.

"신분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분과, 천하디천한 계급의 사람이 그걸(계급을) 다 무시하고 같은 바라본다는 이유로 의기투합하는… 재미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 자체가. 그럼 일 얘기만 했겠냐 이거예요. 간의대를 어떻게 만들고 물시계를 어떻게 만들고 이런 골치 아픈 얘기도 했겠지만, 바람도 쐤을 거예요. 그 시대의 놀이도 하지 않았을까요? 투호, 뭐 그런 거. 그러다 '근데 그거는 이렇게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인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그냥 놀듯이 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처소에 먹칠하고 구멍을 빵빵 뚫고는 '전하, 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죠. 어찌 감히 그랬겠어요. (웃음) 그게 가능한 건 둘이 애기 같은 순수한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죠. (세종은) 열린 마음의 군주, 신분에 관계없이 (신하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넓은 아량, 따뜻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겠죠. (장영실은) 그 따뜻한 품속에서 자기를 인정해주니 (세종이) 너무 감사하고 그래서 더더욱 자기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고요. 왕으로서 존경하는 건 기본이고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정도 들었을 것 같아요. 전 그런 관계를 그렸던 거죠."

최민식은 '천문'이 실제 역사를 주된 소재로 하되, 창작자들의 상상력이 결합된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빈 부분은 '열린 마음'으로 봐주십사 하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좀 열어놓고 보셨으면 좋겠어요. 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진 대신들과 (세종의) 대립은 사실이잖아요. 그걸 왜곡할 순 없죠. 비어있는 부분, 두 사람(장영실-세종)이 만나서 어떤 얘기 할까 하는 정도의 여유, 그런 재미가 있어서 역사극을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기록에 있는 그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묘사하는 건 기본이 되어야 하고, 비어 있는 공간들은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가 저랬을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만들고요. 다큐가 아닌 이상, 영화에는 가공의 드라마가 들어가요. 그게 거부감 없이 현실의 팩트와 어울릴 수 있는가 봐야죠."

최민식은 뛰어난 재주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여러 유용한 기구를 만든 조선의 천재 과학자 장영실 역을 맡았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 장영실-세종 관계, 최민식은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을까

최민식은 언론 시사회 때 장영실을 연기하면서 "좀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자유로움'은 신하-왕 관계에서의 파격이었다. 최민식은 "좀 더 생활적이고 파격적인… 별채에서 뭘 만들다가 뭐가 번뜩 생각나서 버선발로 궁 후원을 가로질러서 막 뛰어가는 거다. 포졸들에게 제지도 받고. '어디 건방지게, 네 집 앞마당인 줄 아느냐' 하면서. 왕이 스케줄 꽉 차 있는데 (자기가 발견할 걸 말하러) 가는 것"이라며 "우리가 역사극에서 전형적으로 봐오지 않은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려고 했다"라고 말했다.

'천문' 후반부에 세종은 한글 창제에 몰두하느라 장영실과의 관계가 비교적 소원해진다. 하지만 한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 '이도'와 함께 그가 써 보이는 글자는 '영실'이다. 최민식은 "(세종은 영실이) 이해해주리라고 믿고 어떠냐고 하는데 (영실은) '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색하다. 이게 뭔지도 모르겠고, 이거 만드시느라고 저를 멀리한 거냐' 하면서 투정 부리지 않나. 그런 인간적인 서운함과 질투가 있다. 여태까지는 나와 모든 걸 상의하고 같이 만들었는데 이것(한글) 때문에 나를 멀리했나, 하는 애기 같은 삐짐이 있고"라고 설명했다.

최민식은 "저는 (장영실과 세종이) 좀 더 티격태격하길 바랐다. 좀 더 재미있고 파격적인 궁궐에서의 생활을 담는 거다. 아주 격렬하게 서로 토론하는 장면도 있었으면 했고. 하여간 욕심이 많아가지고…"라고 덧붙였다.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가 멜로에 가깝게 그려졌다는 반응에 관해서는 "그 상황에 대한 애틋함이다. 사실 (세종이)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너무 외롭겠다는 생각을 해서, 나라도 옆에 있어서 도와드리고 싶은데 힘이 없지 않나"라며 "그런 상황에서의 애틋함이 있었는데 구체적인 디렉션은 없었다. 그냥 상황 설명만 있다. 하여튼 석규랑 저랑 깊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단지 신하-왕의 관계가 아니라 둘의 인간적인 교감이 보이지 않으면 이건 망한다고 봤다"라고 말했다.

"좋을 때가 많이 묘사돼서 그래요. 오랜 친구들끼리 싸울 때, 서먹할 때 이런 것(감정)들이 만약 보였더라면… 근데 전 그렇게(로맨스적으로) 보시는 것도 자유라고 봐요. 정이 느껴지는 건 분명하잖아요. 장영실 입장에서는 세상에… 노비고 천민인 나를 면천도 시켜주고 더더욱이나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까 (세종을 향한) 무한 애정과 존경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때로는 도를 넘을 수도 있잖아요. (세종이) 잠시 왕인 걸 까먹는 거예요. '아, 그게 아니고요~' 만약에 이런 말을 썼다고 쳐봐요. 그럼 '야, 너무 막 나간다, 너?' 하는 거죠. (웃음) 저는 그런 재미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봐요. 실제로 장영실은 세종보다 7살이 많았대요. 요즘 말로 계급장 떼고 말 놓자 하는 상황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그려져야) 전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죠." <계속>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 최민식은 장영실을, 한석규는 세종을 연기했다. 최민식은 한석규와 하는 작품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했을 거라며 애정과 신뢰를 드러냈다. (사진=㈜하이브미디어코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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