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가 보낸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학살하던 때였다. 고립된 광주의 참상을 온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대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싸우고 있었다.
"전국에서 데모를 할 때이니 2학년 과 대표를 하던 제 동생도 틀림없이 나올 것 아닙니까. 사람이 죽는다는데 동생더러 데모하라고 편지를 썼겠습니까. 조심하라고 썼죠."
편지를 쓴 사람은 전경 51기 김상회(61)씨다. 그는 전날 저녁 TV 뉴스에서 군인들의 발포 소식을 짤막하게 전하는 보도를 동료들과 함께 봤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전경들은 밤늦게 부대원 한 명이 갖고 있던 트랜지스터라디오 앞으로 모였다.
이상하게도 방송이 잡히지 않던 그날, 익숙한 주파수 근처에서 한국어이긴 하지만 억양이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광주 소식을 전하는 북한 라디오 방송이었다.
TV에서 본 사건임을 알아챈 김상회씨는 국내 방송이 광주 상황을 보도통제하는 상황이라 보고, 동생 앞으로 보내는 두 장짜리 편지 말미에 "북한 방송을 들으면 왜곡·과장한 사실도 있지만 사실적 근거는 있는 것이 많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광주의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니 시위는 위험할 것이라는 형의 경고는 동생에게 닿지 않았다. 호남지역에서 발신되는 모든 편지는 검열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김씨가 편지에 마지막으로 쓴 한 줄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는 이유가 됐다.
김씨에 따르면 전북도경 대공분실 형사들은 그에게 큰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불순해 보이는 내용이 있었지만 수신자에게 닿지 못했다는 점도 참작됐다.
"전북도경국장(현재의 전북경찰청장)이 대공분실에 한번 오셨어요. 그런데 아무 질책도 없이 '김 일경, 수고한다'며 계엄합수단에서 훈방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대신 부대에서 영창 처분을 하기로 했다고요."
문제는 보안사령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생겼다. 훈방을 위해 형사가 사건을 다소 축소해 작성한 조서에는 라디오를 들었던 부대원 10명가량이 빠지고 김씨 혼자만 남았기 때문이다.
여럿이 청취하면 '우연히 듣게 됐다'고 참작할 수도 있지만, 혼자 들었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김씨는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된 그에게는 구타가 이어졌다.
1980년 8월 8일 전투교육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김씨에게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대법원까지 갔지만 판결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독방에서 1년을 보냈다.
석방된 뒤의 삶은 팍팍했다.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대학은 졸업했으나 전공인 제지공학을 살려 취업하려 해도 번번이 좌절됐다. 결혼 직전 고향에 있는 가족 외에 처음으로 수감 사실을 들은 아내는 "먹고 살기 힘들면 포장마차라도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역사를 알고 싶어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12년을 살았다. 그러나 수감 당시 스트레스에 따른 안면마비 증상이 공부의 꿈도 접게 했다.
취직도 공부도 뜻대로 안 돼 한국으로 돌아온 김씨는 프리랜서로 일본어 통·번역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묻어뒀던 세월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2016년이었다. 광주시청은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의 7차 보상을 위해 김씨에게 연락을 했고, 심의를 거쳐 그는 지난해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씨는 올해 8월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그의 당시 행동이 5·18 직후에 이뤄진 정부 조치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것이라고 판단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민철기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김씨의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킨 12·12사태가 만 40년이 된 날이다.
재판부는 이미 폐지된 반공법 기준을 따른다 해도 "사건 당시 피고인에게 북한에 동조하거나 이를 이롭게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설령 피고인에게 위와 같은 인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행위는 12·12와 5·18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심에서 김씨의 변호를 맡은 장홍록 변호사는 "당연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판결 후 소회를 묻자 "그래도 저는 살아있지만, 1980년 5월 광주에서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라고 답했다.
"40년 동안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못 하고 끙끙 앓을 때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게 물어봐 주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