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내를 죽였다'(감독 김하라)를 채정호(이시언 분) 입장에서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아내를 죽였다'는 희나리 작가의 동명 웹툰으로 이미 큰 사랑을 받았고, 이시언이 데뷔 10년 만에 맡은 주연작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화제가 됐다. 지난 5일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이시언은 "저는 여기(언론 시사회장)에 앉아본 이후에 질문을 제일 많이 받았다"라며 "매우 당황스럽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개봉 이틀 전인 지난 9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아내를 죽였다' 이시언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통상 가장 많은 매체가 모이는 첫 번째 시간대가 아니었음에도, 8개 매체가 몰렸다. 이시언은 "첫 주연이고 안 보여줬던 모습을 보여주다 보니 뭔가 옷을 다 벗고 있는 것 같다"라고 밝혔다.
◇ 그동안 했던 연기와 달라 '도전'하는 마음으로 시작
이시언은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방성재 역으로 나와 널리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언제나 '웃기기만' 한 캐릭터를 맡진 않았다. 충견 노릇을 하며 재벌가 비서실장까지 오른 안수범('리멤버-아들의 전쟁'), 데모하다 돌아가신 노조위원장 출신 아버지 때문에 '가정 지키기'에 혈안이 된 생계형 경찰 강남일('라이브'), 대한민국 상위 1% 성과를 달리는 저승사자 조용기('세가지색 판타지-우주의 별이'), 천성은 순하고 의리가 있지만 전설의 칼잡이로 불린 룸살롱 사장 용팔이('투깝스'), 국정원에서 스카우트할 정도로 뛰어난 해킹 실력을 지닌 해커 임병민('플레이어') 등도 이시언의 몫이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밝고 유쾌한 캐릭터로 더 자주 시청자들을 만났다. 단순하고 우직하지만 입이 방정인 김동수('상어'), 천재병 환자에 연애에 서툰 인기 웹툰 작가 신청재('호구의 사랑'), 넘치게 밝고 단순하며 가끔 허당 같은 모습을 지닌 수행원 오우식('순정에 반하다'), 여리고 순박하고 감수성 넘치는 시골 청년 박수봉('W'), 시끄럽지만 일 처리는 꼼꼼하고 섬세한 엔터사 대표 지대표('맨투맨'), 실없는 소리를 자주 하며 금세 사랑에 빠지는 패설 작가 방세호('엽기적인 그녀'), 오지랖 넓고 경솔하지만 진중한 면도 있는 경찰 신호방('다시 만난 세계'), 한 여자만은 사랑하는 순정남이자 유능한 에이스 형사 박동철('어비스') 등.
'아내를 죽였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시언은 그동안 안 해 본 역할이라서 도전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시언은 "뭔가 고민하는 모습은 잘 보여드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고민 없는 캐릭터였다, 인생이 즐거운.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안 좋은 일도 있는 사람'이다"라고 소개했다.
"사실 비슷한 캐릭터만 너무 많이 한 거 같아요. 물론 사람들은 잘 몰라요. '여기도 나와서 이런 역할을 했어?' 이게 어떻게 보면 다행일 수 있어요. 근데 저 스스로는 조금 지쳐가는 것 같아요. 너무 익숙해진 역할에 대해 뭔가 조금 더 고민도 하고요. 돌아보니까 평범한 사람(캐릭터)도 없었고, 항상 행복한데 뭔가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에요. 연기하는 것도 행복하고, 그때 만난 사람 모두 소중하지만 그래도 다른 연기에 대한 갈증은 항상 있죠. 잘하든 못하든 계속해서 더 잘할 수 있을 때까지요."
이번 채정호 역으로 그간의 갈증이 해소됐을까. 이시언은 "맛만 봤다"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시청자, 아니 관객분들이 보셨을 땐 완벽하지 않게 보실 수도 있겠다. 너무 솔직하게 얘기했나?"라며 다시 한번 멋쩍게 웃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시언은 "이번 영화가 앞으로 다가올 드라마나 영화에, 저한테는 굉장히 좋은 첫 숟가락이 될 것 같다"면서 "최선을 다했다"라고 밝혔다.
◇ 이시언이 생각하는 정호가 망가진 이유
'아내를 죽였다'는 2010년 포털 다음에서 연재된 희나리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했다. 이시언은 웹툰을 다 봤다며 "정호 캐릭터 표현을 너무 잘했더라. 이런 걸 많이 참고했는데 영상으로 봤을 때는 좀 다른 느낌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아내를 죽였다'에서 이시언은 거의 모든 장면에 출연하다시피 한다. 촬영 기간은 40일 정도에 불과했고, 예산도 적어 쉬운 현장은 아니었다. 이시언은 "장비가 부족하고 (일정이) 타이트해서 모니터를 많이 못 한 게 너무 아쉽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름 공들여서 찍는다고 했는데 여건이 안 되다 보니까 힘들었다. 스태프들도 (수가) 부족했다"라며 "의상이 총 2벌, 마지막까지 3벌인데 마지막은 하루 만에 찍었다. 뭔가 시간이 더 많았으면 더 공들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쫓겼던 것 같다"라고 아쉬워했다.
극중 정호의 몰락은 생각보다 급격히 진행된다. 회사에서 잘리고 나서 확 망가지는 흐름이다. 이시언은 "망가진 이유는 권고사직 그런 것보다는 사람 자체가 도박을 좋아해서인 것 같다. 애초에 그랬던 사람 같기도 하고. 근데 사실 도박에 빠졌다기보다 와이프도 있고 하니까 가족을 위해 도박한 게 아닐까. 일확천금을 노릴 때는 그 방법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빚도 생기고. 모든 도박하는 사람이 재미를 위해서 하진 않을 것 같다. 돈을 많이 벌어서 도박한 걸 합리화하고 싶었을 것 같고, 정호도 그랬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술에 취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블랙아웃' 현상은 자주 경험해 봤다고. 이시언은 "서른 넘어가면서부터 확실히… '어떻게 집에 갔나?' 하게 되는 것 같다. 기억이 안 나는데 물어보면 잘 갔다고 하더라. 근데 택시 어떻게 잡았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래도 사람 죽인 적은 없어가지고"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묻자 별거 중인 아내 미영(왕지혜 분)을 찾아왔다가 집 밖을 나선 후,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라고 답했다. 이시언은 "'오빠가 다 원래대로 돌려놓을게'라고 하지 않나. 그 장면이 제일 좋다. 술 안 먹고 찍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단계별로 술 취하는 장면이 있어서 그 부분도 신경을 많이 썼다. 한 번 꺾이는 부분이 있는데 관객들이 잘 이해하실지는 모르겠다. 저는 제가 해서 잘 알지만. 바에서 조금 깬다. 바텐더와 술을 더 마셔서 집에 갈 때 더 취하는 건데 그 부분이 시간상 편집이 많이 됐다. 술 더 마셔서 취하는 장면이 좀 약해졌다"라고 부연했다.
◇ 10년 만에 만난 왕지혜, 초면이었던 안내상
이시언은 데뷔작인 드라마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서 왕지혜와 함께 연기했고, 10년 만에 다시 한 작품에서 만나 부부 연기를 하게 됐다. 이시언은 "10년 전이랑 많이 달라졌더라. 그때 지혜가 20대 중반이었고 지금 30대가 됐는데, 무게감이 많이 생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정호와 미영은 극중 신혼이지만 정호의 거듭되는 거짓말로 인해 사이가 틀어지고 별거 중이다. 영화 초입에는 사랑과 희망에 찬 모습이 나왔다. 이시언은 "첫 장면에서 지혜 씨랑 베드씬 아닌 베드씬이 나오는데 그때 감독님이랑 얘기를 많이 했다"라며 웃었다. 그는 "감독님은 조금 더 (수위 높게) 갔으면 했고, 저는 인제 구식이라… 지혜 씨 의견도 있었고 그래서 지금대로 나왔다"라고 설명했다.
이시언은 "촬영하는 날 처음 뵀다"면서도 "처음 뵌 것 같지 않았다. 굉장히 편했다"라고 말했다. 하필 첫 촬영이 프라이팬으로 안내상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이어서 곤란했단다. 이시언은 "그 프라이팬이 가짜다, 진짜가 아니고. 처음에는 살살 치는 걸 몇 번 했는데 마지막에 진짜 쳐버렸다. 어쩔 수가 없더라. 그게 고무인데 그래도 아프셨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김하라 감독은 이시언이 촬영 현장에 준비를 많이 해 와서 즐겁게 촬영했다고 밝혔다. 어떤 점을 신경 써서 준비했냐고 묻자 이시언은 "제일 신경 썼던 건 정호의 감정선 연결이었다"라면서도 "제가 제 입으로 영화에 대해 평을 못 할 것 같다"라고 말을 아꼈다. 다만 "정호 입장에서 몰입해서 보시면 좋을 것 같다"라고 관전 포인트를 귀띔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