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된 은퇴도 경영혁신"…'첫 무고 승계' LG 구자경 명예회장 별세

LG 25년 이끌며 1150배 성장...'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으로 연구개발 주력
재계 첫 무고 승계…"잘 된 은퇴도 경영혁신의 일환이었다"
3대·57년에 걸친 구·허 양가의 동업관계 '아름다운 이별'로

1999년 고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고 구본무 LG회장이 생전 담소를 나누는 모습(=LG그룹 제공)
1970년부터 LG를 25년 동안 이끌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고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으로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은 경영인이었다.

특히 국내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회장직을 물려주는 무고(無故, 아무런 사고나 이유가 없음) 승계 사례를 남겼다.

경영 일선에서 물라난 뒤 14일 향년 94세 일기로 별세하기까지 소박한 자연인의 삶을 살아 재계의 귀감이 됐다고 평가받는다.

◇LG 25년 이끌며 1150배 성장...'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으로 연구개발 주력

14일 LG그룹에 따르면, 부친 구인회 창업주를 도와 LG창업 초기부터 45년간 기업 경영에 참여했던 구 명예회장은 2대 회장으로 추임한 이래 매출액을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시켰다.


국토가 작고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기술 경쟁력이라는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생각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개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는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 도입, 민간기업 최초의 기업공개,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가로 평가된다.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재계 첫 무고 승계…"잘 된 은퇴도 경영혁신의 일환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스스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고인의 퇴진은 국내 재벌가 최초의 무고 승계로 기록됐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퇴진했다.

이는 당시 WTO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고 LG그룹은 전했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결심하면서 '멋진' 은퇴보다는 '잘 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육상 계주에서 앞선 주자가 최선을 다해 달린 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턴 터치가 이루어졌을 때 '잘 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경영 승계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던 것.

그는 훗날 회고에서 "은퇴에 대한 결심은 이미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차기 회장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내 나름의 밑그림이었다. 그래서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되었고, 혁신의 대미로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후에 구 명예회장은 지인들에게 당시 은퇴할 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섣달을 보내며 나름의 감회를 지니게 되지만 내게는 각별히 다른 의미가 하나 더해진다. 선친의 기일 역시 섣달 그믐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의 섣달그믐만큼은 참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 이때는 이미 마음속의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 3대·57년에 걸친 구·허 양가의 동업관계 '아름다운 이별'로

구자경 명예회장이 퇴임 후 2000년대 들어 3대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도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57년간 불협화음 없이 일궈온 양가의 동업관계는 유례가 없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업매각이나 합작, 국내 대기업 최초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 모든 위기 극복과 그룹 차원의 주요 경영 사안은 양가 합의를 통해 잡음 없이 이뤄졌다.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도 순조롭게 진행했다.

구 명예회장 직계가족은 전자와 화학, 통신, 서비스 부문을 맡아 LG그룹으로 남기기로 했고, 허씨 집안은 GS그룹을 설립해 정유와 유통, 홈쇼핑, 건설 분야를 맡기로 했다.

전선과 산전, 동제련 등을 묶어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창업고문이 LS그룹을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LG그룹은 "이처럼 순탄하게 계열 분리가 이뤄진 배경에는 구 명예회장이 '인화(人和)의 경영'을 철저히 지켰고, 상호 신뢰와 의리를 바탕으로 사업을 이끌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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