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10여 년간 수집한 자료로 만든 '일본군 위안소 지도'를 지난 7일 공개해 주목된다.
이 지도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wam)'이 아시아·태평양 전역에서 고통 받았던 일본군 성 노예 실태를 알리기 위해 전쟁 당시 위안소가 있던 장소를 지도에 표기하고, 피해자들의 증언 등을 기록한 것이다.
해당 지도에 기록된 한반도 내 위안소는 서울시, 인천시, 부산시, 전남 목포시, 경남 창원시, 제주도 서귀포시, 강원도 원산시, 평안남도 순천군, 함경남도 함주군, 양강도 혜산시, 함경북도 청진시, 함경북도 회령시, 나선시 등 모두 13개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에 의하면 서울시에 있던 위안소는 용산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993년 8월 1일 발행된 하라다 카즈오(原田一雄)의 '말과 군인(馬と兵隊)' 19페이지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외출이 일정기간이 지나면 허용됐으며, 위안소가 있던 부대에서 삼각지까지 이태원 언덕을 올라 30분 정도를 갔다'는 회고가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인천시에 있던 위안소는 위안부 피해자 이종녀 할머니의 증언과 조선 20사단 2095부대 한 중사의 증언으로 존재가 확인됐다. 이종녀 할머니는 피해 증언에서 "구청장에게 속아 1943년 7월 배를 타고 서울로 가게 됐고, 이후 트럭을 타고 인천으로 호송됐다. 도착한 곳엔 인천 고무공장 근처 연립 주택과 14개의 방이 있었는데 넓이는 2미터×1.3미터 정도였고 벽돌로 분리돼 있었다"면서 "이곳에서 지내며 낮에는 일본군 병영 청소를 하고, 저녁에는 14~15 명의 군인을 상대했다. 위안소 책임자는 일본인이었다"고 했다.
부산의 위안소는 영도구에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 윤두리 할머니는 "14살 때, 10명의 어린 소녀들과 함께 영도교를 건너 500미터 떨어진 부산 영도 제1위안소로 끌려갔다"면서 "다카야마라는 일본인이 운영했던 이 위안소에는 45명의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 1일 평균 30~40명을 상대해야 했다"고 증언했다. 노구치라는 일본인은 자신의 책에서 "1945년 1월 3일, 4박 일정으로 부산에 정박 예정이었다. 정박 후 병사들의 목적지는 전원 위안소였다"고 썼다.
전남 목포시에선 김복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소의 존재가 확인됐다. 김복순 할머니는 일본 군인들에게 붙잡혀 목포 시내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산 속으로 끌려가 4일간 고초를 겪었다.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 군인은 300여 명이었다.
경남 창원시의 위안소는 과거 마산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는 이경생 피해자 할머니와 일본군 타니모토 미츠오(谷本光生)의 증언에서 확인되는데 타니모토 미츠오는 "외출이 허용되는 일요일, 외출을 허가받은 군인들은 막사 앞에 정렬해 복장검사를 받고 외출증과 콘돔 등을 전달받는다. 군인들은 식당 등에서 술을 마시고 일본인 기생이나 조선인이 있는 유곽을 찾아갔다"고 했다.
제주도의 위안소는 제주도민의 목격담과 일본 군의관의 증언으로 모두 3군데가 확인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제주도 성산포에는 2개의 위안소가 있었고, 휴일이 되면 위안소 앞 대기줄이 길게 늘어졌다. 카즈야 일본 군의관은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항 위안소에 있던 피해자들을 상대로 1주일에 한 번 건강을 점검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현재 한반도 지역 이외에도 일본, 대만, 베트남, 필리핀, 태국, 중국, 싱가포르, 괌 등 20여 개 국가에서 운영됐던 위안소 위치와 정보를 표시하고 있으며, 각 지역을 누르면 해당 지역 관련 위안부 범죄기록과 피해자 증언, 일본군의 회고 등을 열람할 수 있다.
wam 사이트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성 노예제도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시민들에 의해 1990년대 중반 처음 만들어져 여러 버전으로 업데이트돼 왔는데, 이후 wam이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 일본군 회고록, 군 관련 자료 등을 10년간 수집해 데이터화했고 지난 7일 '일본군 위안소 지도'를 공개한 것이다.
'일본군 위안소 지도'는 새로운 증언이 확인될 때마다 계속 업데이트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