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다리' 다시 꺼내든 北… 수위 올리면서도 '상황 관리'

'경솔하고 잘망스러운 늙은이'라며 '늙다리'도 거론
북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의 표현 꾸준히 사용
여러 방법으로 수위 조절하면서 살얼음판 걷는 모양새
김영철·리수용 등판, 좀더 '급' 올리기로도 해석돼
"국무위원장, 최종 판단과 결심하게 될 것"

지난해 7월 남북통일농구경기 당시 북한 노동당 김영철(왼쪽에서 두 번째)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당시 직책)이 평양 고려호텔에서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환담한 뒤 호텔을 나서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북미 비핵화 협상이 '연말 시한'을 앞두고 위기를 맞은 가운데 양측간 '말싸움' 양상이 지난 2017년의 '로켓맨'과 '늙다리(dotard)'까지 슬금슬금 거론되며 살얼음판을 걷는 모양새다.


다만 북한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아직 최종 판단과 결심을 하지 않았다'며 '새로운 길'을 갈 것이라고 확정짓지는 않는 등, 나름대로의 방법을 통해 수위 자체는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노동당 김영철 부위원장은 9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낸 담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최근 경고 메시지에 대해 거칠게 반응했다.

김 부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에 대해 "참으로 실망감을 감출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이럴 때 보면 참을성을 잃은 늙은이라는 것이 확연히 알리는 대목이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가 매우 초조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며 "이렇듯 경솔하고 잘망스러운(잘고 얄미운) 늙은이여서 또다시 '망령든 늙다리'로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다시 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도 비아냥거렸다.

북미 무력충돌 위기 상황이던 2017년 9월 2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성명을 내고 "미국의 늙다리 미치광이(mentally deranged US dotard)를 반드시, 반드시 불로 다스릴 것이다"고 했었다.

김 부위원장의 담화 몇 시간 뒤엔 리용호 현 외무상의 전임자인 노동당 리수용 국제 담당 부위원장까지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나서서 "재앙적 후과를 보기 싫거든 숙고하는 것이 좋다"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심기를 점점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트럼프의 막말이 중단돼야 할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한 번 나왔던 최고 수위의 비난 발언을 일단 꺼내 보여주기는 하되, "부르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다시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정식으로 '늙다리'라고 부르지는 않은 셈이다.

실제로 북한은 2019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에서도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며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써 왔다.

외무성 최선희 제1부상 또한 지난 5일 "지금과 같은 위기일발의 시기에 의도적으로 또다시 대결 분위기를 증폭시키는 발언과 표현을 쓴다면 정말로 늙다리의 망령(senility of a dotard)이 다시 시작된 것으로 진단해야 할 것이다"며 교묘한 화술로 이 카드를 다시 꺼내기도 했다.

동국대 북한학과 김용현 교수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가능성을 세게 만들어 주는 표현이다"면서도 "강하게 '하겠다'는 것이긴 하지만, 여지를 열어 두는 뉘앙스는 있다. 아직까지는 수위 조절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다만, '잘망스러운(잘고 얄미운) 늙은이'라 비난하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 호칭도 생략하면서 강도 자체는 올라갔다. 이른바 '로켓맨' 표현에 대해 앙갚음은 해야겠다는 뜻이다.

정보기관인 통일전선부의 수장을 맡았고, 북한의 외교안보라인을 총괄하던 인사인 김영철 부위원장의 등판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그는 지난해 열린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매번 김정은 위원장을 수행했고, 북미대화도 맡았던 중요 인사였다.

그러던 그가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인 지난 6월 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당시 포착되지 않는 등 2선으로 물러난 것처럼 보이면서, 미국 인사들과의 신경전이나 '말싸움'은 한동안 주로 외무성이 맡아 왔다.

지난 8월 23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맹비난했던 리용호 외무상이나 북미실무협상의 미국 측 대표인 김명길 순회대사, 김계관 고문, 최선희 제1부상, 리태성 미국 담당 부상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영철 부위원장이 북미대화와 관련된 문제에도 나타나면서, 미 국무부 부장관으로 지명된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격'이 맞는 최 부상이나 김명길 순회대사 등보다 좀더 높은 '급'의 인물을 등장시키는 효과 또한 노린 것으로 보인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오른쪽)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리수용 부위원장(왼쪽)이 지난해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판문점에서 양 정상의 식수 행사가 끝난 뒤 대화하고 있다. (사진=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같은 날 밤 외교 전선에서 잔뼈가 굵고 그 자신 또한 외무상을 지낸 리수용 국제 담당 부위원장의 등판 또한 마찬가지로, 고위 인사들을 통해 메시지의 '급'을 올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김영철 부위원장은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지만, 우리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 대통령을 향해 아직까지 그 어떤 자극적 표현도 하지 않았다"면서도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나는 트럼프에 대한 우리 국무위원장의 인식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도 덧붙였다.

리수용 부위원장 또한 "얼마 안 있어 연말에 내리게 될 우리의 최종 판단과 결심은 국무위원장이 하게 되며, 국무위원장은 아직까지 그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은 상태에 있다"며 "또한 누구(트럼프 대통령)처럼 상대방을 향해 야유적이며 자극적인 표현도 쓰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를 바꿔 말하면 아직까지 김정은 위원장이 '새로운 길'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지 않았고, 아직 그가 직접 강경 메시지를 내는 사태로까지는 번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미대화의 길 또한 가능하다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을 추가로 압박할 경우 그나마 북미관계를 지탱해온 '정상 간의 친분'마저 파탄날 수 있다는 '레드라인'을 제시하면서도, 여지는 열어 놓는 이중의 카드를 제시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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