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현(이하 임) : 난 많이 아쉬웠다. 원작도 다큐 구성물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책이 훨씬 입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보면서는 많이 울면서 봤는데,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세상은 변한 것 같은데 전혀 안 변했고 안 변한 것 같은데 또 변했다는 거다. 나를 포함한 내 엄마 세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모습이 왜곡되고, 그게 잘못된 것조차 모르고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했거나 '이건 아니다' 생각이 들어도 받아들인다고 했다면, 요즘은 문제를 말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일부만 말하고, 말하지 못해 병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종적으로 변한 것 같으면서도 안 변했고, 안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했다는 느낌이 든다.
영화를 봤을 때 지영(정유미 분)이 아픈 게 굉장히 큰 이슈다. 엄마(김미경 분)에게 빙의한 모습 등이 처음에는 쇼킹했지만, (소설과 달라진 화자 때문인지)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주인공은 오히려 김지영의 남편(공유 분) 같았다. 김지영과 결혼한 남자가 (아내의 병에 관해) 고민하고, 그런데 말도 못 하고, 다 자기가 잘못해서 이런 것 같아 미안해하고, 병원 가자는 말도 못 하는… 남편의 심정은 이해가 되게 그려지는 반면, 지영은 자기가 빙의돼서 어떤 말을 하는 줄도 모르는 상황이라 개연성이 떨어지고 주인공을 향한 몰입도도 떨어졌다. 소설 자체도 다큐 구성물이나 방송 대본 같은 느낌인데 그걸 영화나 극으로 하려면 김지영이라는 주인공이 (극을) 조금 더 끌고 가는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적어도 앞에서 중반까지 주인공은 공유 같아 보였다. 의사 앞에 앉아서 처음으로 말할 때 '아, 주인공이구나!' 싶었다.
이진욱(이하 이) : 보고 나서 든 첫 생각은 사람들이 많이 보겠다는 거였다. 영화가 나온 후에는 혐오 발언이 예상보다 힘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무난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장모에게 보여드렸는데 울었다고 하더라. 영화를 보고 내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측면에서는 상업영화로서 사람들한테 많이 다가갈 수 있게끔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소설을 보면 김지영의 정신과 의사가 김지영을 진단하면서 모든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다. 그걸 영화 속에서는 남편 정대현이 한다. 남편 역할이 커진 게 남성 관객들한테 호소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 회상 장면을 보면 (성평등 인식에 대해) 지금보다 더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 아내의 병을 알고 난 후에 변하게 되는 과정이 자세하진 않아도 조금씩 천천히 쌓여갔다고 봤다. 남성 캐릭터의 변화상을 담은 건, 이 영화를 보는 남성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거라고 봤다.
◇ 김지영의 서사 : 과연 김지영은 모든 불행과 부조리를 온몸으로 겪었는가
임 : 김지영 삶이 사회적인 핍박과 차별을 받아 응축된 덩어리라는 생각이 난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김지영 엄마의 삶이나, 직장 동료들이 회사에서 불법촬영을 당한 것 등 이런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 정도였다고 본다. 오히려 나는 한 여성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문제를 건드려주기를 되게 기대했는데, 그러기에는 김지영이 너무 복합적이지도 않고 단편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다는 설정이 너무 크기도 했고. 김지영이 회사에서 느꼈던 부조리함은… 김 팀장(박성연 분) 팀에 못 들어간 것 외에 뭐가 나왔나? 물론 어렸을 때 '아들 아들' 하던 할머니 얘기 같은 건 나왔지만. 책도 사실은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겪은 일이나 김지영의 생각을 풀어냈다기보다는, 김지영이라는 한 인물을 두고 부모, 친구 등 주변 인물들을 계속 언급했다. 오히려 책에서는 그 개별 에피소드에 몰입이 잘됐던 것 같다. 영화는 그게 잘 안 되더라. 좀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정(이하 김) : 저 같은 경우도 김지영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저렇게 이해하는 남편이 잘 없다. 또 시어머니도 괜찮은 사람이다. 아프다고 하니까 약을 보내주고, 아들이 며느리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하니까 진짜 안 하고 집에도 안 찾아간다. 불편해할까 봐. 지영에겐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크면서 아들 위주로 흘러가는 차별을 겪었겠지만 똑똑한 언니 은영(공민정 분)이 있었고, 비교적 개방적인 엄마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 : 저는 그런 생각도 한다. (김지영의) 불행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폭력 같은 것,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이 있거나 굉장히 지저분한 언어 성희롱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안 들은 여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 벌어지려고 할 때, 다행히 스카프 여인(염혜란 분)과 아빠(이얼 분)가 등장해서 위험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상상 가능한 끔찍한 정도까지 가지 않더라. 그런 부분에서 극단으로 몰지 않아서 그나마 가슴 덜 졸이며 볼 수 있었다. 영화 보고 친구들과 가장 많이 한 말은 '이건 너무 현실의 순한 맛이고 정말 매운 맛은 나오지도 않았다'는 거였다. 이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테러한다는 게… 그러니까 이 정도의 온건한 영화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정말로 시대 흐름에 따르고 싶지 않다는 걸 자인하는 거라고 봤다. 심지어 이 영화가 말을 거는 방식이 저는 굉장히 친절하고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이건 페미니즘 영화야!'라고 했으면 이 정도 수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임 : 특히 대한민국에서 생활해 본 여성이라면 나이가 들었든 어리든 한 번쯤은 경험하거나 같은 걸 느꼈기 때문에 와닿았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의 세대, 내 엄마 세대, 나보다 훨씬 어린 82년생들이 느끼는 게 종적으로 와닿았다. 영화에서는 전업주부의 고독함을 다뤘는데 직장맘도 고독하다. 김지영과 비슷한 또래 후배가 아내랑 영화를 봤는데, 아내는 감정 이입이 안 된다고 하더라. 김지영보다 더 처절하게 살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나서 느꼈던 건 김지영도 고독하고, 일하는 젊은 엄마도 고독하고, 남편의 이해도나 여성의 사회 지위가 더 떨어졌던 시간을 보냈던 나도 고독하다는 거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거다. 김지영의 대사 중에 다 벽인 것 같고 출구가 없는 것 같다고 한 말에 정말 공감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게 아닐까. 난 30대~40대 초반까지 터널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유난히 한국 여성의 불행을 다 겪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먼저 진입한 영역도 많았던 수혜자인데도 터널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절박함과 고독함이 항상 엄습했다.
이 :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컸던 건지….
임 : 그렇다. 사회적인 문제라는 걸 몰랐기도 했고, 알아도 표현할 수 없었고, 표현하는 순간 내가 엄청난 걸 감수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전업주부나 일하는 엄마나 다 우리의 현실 아닌가. 다만 다들 가 보지 않은 길을 동경한다는 느낌? 김지영은 일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나. 근데 거기 나온 팀장의 삶이 과연 행복할까 싶더라.
◇ 기억에 남는 부분 : 이 영화가 가지는 '현재성'
임 : 어, 나는 지영이가 의사 앞에 앉는 장면과 그의 독백. 그게 가장 좋았다기보다 기억에 남고. '그래. 그렇지'라고 받아들였다.
김 : 드디어 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좋았다는 건지?
임 : 그건 아니고… 그런 건 있었다. (남편이) '내가 도와줄게'라고 하거나 좀 더 쉬자고 하는 말. 집에서 쉬는 게 쉬는 건가? 그런 황당함이 있다. 너무 맨날 들었던 얘기라 난 싫더라.
임 : 대현 역을 보면서 느꼈던 게 세대 차이다. 내 주변, 내 또래하곤 다르기 때문이다. 50대 이상은 대다수가 김지영의 아버지처럼 생각할 것이다. 사실 일-가정의 양립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가부장제 때문 아닌가. 내 또래끼리는 많이 하는 말이 있다. 퇴근? 퇴근이 어딨냐고. 가정으로의 출근이라고. 남편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침대에 눕는다고. 그래서 난 대현이 정말 새로운! 신인류였다. 적어도 와이프가 힘들어한다는 걸, 뭔가 같이 고민하려고 하잖아. 난 굉장히 긍정적이다. 만약에 남성 관객이 그 인물(대현)에게 감정이입을 한다고 하면, 우리 사회(미래)가 진짜 밝다고 본다.
김 : 김지영의 서사가 저한테 의미 있었던 부분은… 영화 보면서 저 역시도 기혼 여성의 삶, 특히 아이를 기르는 전업주부를 엄청 단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는 거다. 비혼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얼마나 고단한지 알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어서 결혼을 부정적으로 느끼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예 결혼하지 않아서 그런 여지를 안 만들 거라는 생각으로. 특히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전업주부는 별로 되고 싶지 않았다. 전업주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너무 잘 알았고, 겉으로 혐오 발언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모르게 차별과 편견에 물든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걸 돌아보게 됐다.
임 : 난 다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만약 5년 뒤, 10년 뒤, 20년 뒤 다시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이건 분명 과도기인 것 같다.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은) 지금 상황에서만 유효한 것 같다.
김 : (이 영화가) 지금 상황에서만 유효하다면 그건 긍정적인 것 같다.
임 : 그렇게 되어야지.
◇ 기억에 남는 부분 : '혐오'에 대하여
이 :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전 그걸 보면서 좀 소름 끼쳤다. 과거 회상신으로 침대 위에서 지영과 대현 부부가 얘기하는데, 대현이 아이 낳아달라는 거랑 밥 달라고 하는 걸 같은 선상에 두고 이야기하는 부분. 누군가는 침대 위에서 햇살이 내려오고 그런 대화 나누는 걸 알콩달콩하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 장면이 되게 의도됐다고 봤다. 나중에 보니 책 속에도 그런 비슷한 대사가 있더라.
김 : 아까부터 '육아하는' 전업주부에 대해 많이 얘기하는데, 애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렇게 좀 보여주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요새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맘충', '노키즈존' 얘기를 하는데 저 얘기를 하는 사람조차 엄마 품에서, 혹은 엄마가 아니더라도 양육자가 있어서 지금 성인이 된 게 보통이지 않을까.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겪는 미숙함에 대해 너무 혐오하는 분위기가 놀랍더라. 예전부터 그랬을 수도 있지만 요새 더 자주 드러나는 느낌?
임 : 근데 정말 '맘충'이란 말을 실제로도 쓰나?
이 : 앞에 대놓고는 그러지 않아도 그런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아이들 데리고 대중교통 타는 게 쉽지는 않더라. 층간소음 문제도 있고. 죄송하다고, 아이니까 양해 구한다고 하는데도 잘되진 않더라.
김 : 지금 성인들이 보여주는 아동 혐오를 보면 자기는 아이였던 시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본인이 아이였던 시기는 다 잊은 것 같다.
이 : 또 하나 느끼는 건, 공격의 대상이 참 쉽게 '잘못' 선정된다는 거다. 저는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고, 같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 이주민 등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를 옥죄는 사회적 환경이나 조건이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어떤 현상이나 당사자들에게 공격의 초점이 가다 보니 그 싸움에서 이득 보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다.
◇ 연기 : 정유미를 비롯한 여성 배우들의 호연
김 : 저는 사실 정유미 씨 연기가 정말 좋았다. 그동안 그분 연기를 많이 본 건 아니지만, 넋 빠진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김지영의 이야기가 영화 안에서 파편화됐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그런데도 순간적인 몰입도를 높였던 건 정유미 씨의 연기 덕이었다고 본다. 주인공 치고 대사도 별로 많지 않은데, 미묘한 표정 변화라든가 빙의했을 때 보여주는 말투 같은 게 기억에 남는다. 좀 더 회자되어도 좋을 연기라고 생각하는데, 개봉 시기 때문에 올해 영화 시상식에 후보로 오르지 못한 게 안타깝더라. 또 김 팀장 역의 박성연 씨는 '독전'에서도 나왔는데 원래 연기 잘하는 걸 알았다. 전반적으로 여성 배우들의 연기가 다 좋았다. 지영의 엄마, 시어머니 배우 이름이 다 김미경 씨인데 두 분 연기도 좋았고, 은영 역 공민정 씨, 직장 동료 역 이봉련 씨도 인상적이었다. 스카프 여인 역 염혜란 씨 같이 지나가는 역할조차도 캐스팅이 잘됐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