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② "손발 철사로 묶여…" 대마도로 흘러간 제주 4·3 희생자 (계속) |
◇ 4·3 당시 대마도 각지에 한국인 시신 떠밀려와
고인이 된 대마신문 아카시 기자가 생전에 증언한 말이다. 아카시 기자는 70여 년 전 대마도로 떠밀려온 한국인 시신을 취재한 인물이다. 아카시 기자는 하대마도 이즈하라 지역에서 한국인 시신들을 직접 목격했다.
지난 10월 16일 대마도 이즈하라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전직 니시니혼 신문 대마도 주재기자 오에 마사야쓰(70)씨도 취재진에게 아카시 기자와 같은 얘기를 했다. 오에 씨는 아카시 기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기자다.
"제주4‧3과 한국전쟁 시기에 대마도 남동쪽인 이즈하라뿐만 아니라 대마도 서쪽 해안, 중대마도 무인도인 구로시마 섬까지 한국인 시신이 떠밀려 왔다. 그 시기에 매우 많은 시신이 대마도 곳곳에 흘러왔는데,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취재진이 10월 15일부터 18일까지 상대마도 사고만(북서쪽), 중대마도 고후나코시(동쪽), 하대마도 마가리 마을(남동쪽) 등지에서 만난 주민들도 아카시 기자와 오에 씨의 말처럼 "4‧3 시기인 1950년 전후로 한국인 시신이 해안가로 많이 떠밀려 왔다"고 공통되게 증언했다.
주민들은 한국인 시신임을 알 수 있었던 이유로 "입고 있던 옷차림이나 얼굴 생김새를 보고 한국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에서 생활하다 해방 후 대마도로 건너온 주민이 많아 생김새를 보고 단번에 한국인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마도 인근 해상을 지나던 선박이 사고를 당해 그 시신이 대마도 해안가로 떠밀려왔을 수도 있지만, '1950년 전후'에 집중적으로 대마도 해안 곳곳에서 수십 구씩 동시다발적으로 떠밀려 왔다는 점에서 그 시기에 흘러온 시신 상당수가 4‧3 수장 학살 희생자일 가능성이 크다.
1950년 전후는 제주에서 초토화 작전, 예비검속 등 4‧3 광풍이 몰아치며 군‧경이 무고한 양민을 많게는 500명 적게는 수십 명씩 수장 학살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 수장 학살 희생자, 대마난류 따라 대마도까지
제주대학교 지구해양과학과 문재홍 교수는 지난 8일 대학 연구실에서 취재진이 '해류 흐름상 4.3 당시 수장 학살 희생자 시신이 대마도까지 갈 수 있는지' 묻자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제주도 주변에 흐르는 해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쿠로시오 해류에서 갈라져 나온 대마난류여서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흐른다. 제주도 인근 해상에 물체를 떨어트리면 그 흐름을 따라서 대마도로 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바람의 영향으로 지체될 수 있지만 보통 2~3일이면 대마도까지 간다."
또 문 교수는 4‧3 시기 모래사장이나 폭포 등 해안가에서 총살돼 아직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도 "연안과 외해의 순환이 이뤄지기도 하고, 어떤 원인에 의해 시신이 외해로 이동하게 되면 대마난류를 따라 대마도까지 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3월 제주 추자도에서 실종된 낚시객 2명의 시신이 20여 일 만에 일본 대마도 동쪽과 남서쪽 해상에서 발견됐다. 앞서 2003년 4월에도 서귀포시 남원읍 해상에서 물질하다 실종된 해녀의 시신이 18일 만에 대마도 해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대마도 현지 어부인 나카시마 노보루(68)씨는 대마도 주변 해류 흐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대마난류는 사실상 강과 같다. 대마도는 그 강 속에 있는 작은 섬이다. 강의 흐름을 방해하는 물체나 표류물은 대마도 곳곳에 닿을 수밖에 없다." 취재진이 대마도 현지에서 4.3 수장 학살의 흔적을 찾았던 이유다.
※ 내일(27일)부터 3회에 걸쳐 제주CBS 취재진이 대마도 현지에서 처음으로 확인한 수장 학살 희생자 매장지를 조명합니다. 차례대로 △상대마도 사고만 △중대마도 고후나코시 마을 △하대마도 마가리 마을 매장지를 보도합니다. 일본어 통역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번역 전공' 대학원생 이하 토모키(27)씨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