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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생(生)의 기억조차 말살…제주 4·3 수장 학살의 비극 (계속) |
제주 4‧3 당시 '수장(水葬)' 학살은 그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고, 시신을 수습할 수조차 없어 가장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희생자들은 배에 실려 먼바다에서 총살당하거나 몸에 돌이 매달린 채 물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다.
◇ "먼바다에서 돌 매달아 빠트리거나 총살 뒤 수장…"
4‧3 당시 수장으로 학살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군‧경이 사람들을 배에 태우고는 인근 바다로 나가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돌을 달아매 물속에 빠트렸다. 또 배 위에서 총을 쏴 바다로 던졌다.
민간인에 대한 첫 수장은 1948년 11월 5일에 이뤄졌다. 이 시기는 군‧경이 제주 전역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당시 제주에 주둔하던 제9연대는 사상범으로 분류된 직장인 30여 명을 재판도 없이 제주 앞바다에 수장했다.
이 수장 학살은 사건 발생 18일 만에 한 시신이 제주시 사라봉 밑 해안가에 떠오르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그 시신은 신한공사 제주농장의 직원이었던 김기유(당시 26세)씨였다. 이후 김 씨 시신을 포함한 몇 구만 수습됐을 뿐 나머지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친정집으로부터 동생이 바다에 던져진 것 같으니 사라봉과 삼양 해안을 찾아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아버지가 배에 동생을 싣고 갔던 선원을 만나 산지부두와 관탈섬 사이(제주시) 바다에 33명이 던져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기유 씨 누나 김기순 씨의 증언)
이러한 수장 학살은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진행됐다. 제주도에 수장 학살 희생자로 신고된 명단을 보면 이 시기 희생자들이 '제주시 건입리 앞바다' '서귀포 앞바다' '모슬포 앞바다' 등에 수장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이 시기 제주도 전역의 모래사장이나 해안가에서 총살됐다가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도 대마도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있다. 썰물에 의해 시신이 바다로 흘러갔다가 해류에 의해 대마도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8년 11월 초 해안가와 인접한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총살로 아버지를 잃은 오순명(76)씨는 "서귀포시 중문면, 안덕면 주민들이 정방폭포에서 총살되거나 죽창으로 살해돼 폭포 아래로 떨어졌다. 시신을 찾은 유가족도 있지만, 100여 구는 여태껏 수습을 못 했다"고 말했다.
◇ 예비검속 500명, 배 10척에 실려 제주 바다에 수장
수장 학살은 초토화 작전 시기에만 집중된 게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제주경찰서에 예비검속으로 연행됐다가 같은 해 7월과 8월 사이 제주항 앞바다에서 제주읍‧애월면‧조천면 주민 500여 명도 잔인하게 수장됐다.
그 당시 오빠 김임배 씨를 수장 학살로 잃은 김이선(88·여)씨는 "경찰서에 수감된 오빠에게 옷을 주려고 갔더니 경찰관이 없다고 했다. 그 경찰관 말로는 오빠를 배에 태워서 3시간 정도 바다에 나간 뒤 총 쏘아 죽이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트렸다"라고 증언했다.
김 씨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잃은 강창옥(83)씨도 "1950년 7월 중순쯤 아버지가 다른 주민 500여 명과 함께 알몸으로 배에 실려 가 수장당했다고 들었다. 나중에 그해 8월 대마도에서 시신이 떠올랐다는 사실을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들었다"고 흐느꼈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있다.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제주항 부두에 파견돼 경비를 섰던 故 장지용 씨는 생전에 "1950년 한여름 밤 알몸 상태의 500여 명이 배 10여 척에 태워져 바다로 나갔는데 한참 지나고 배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 "수장에는 고기잡이배가 이용됐는데 수장 닷새 전 제주시 탑동에서 먹돌을 가져다가 배에 싣고 있었고, 먹돌에 손가락 굵기만 한 줄을 매다는 것을 근무 중에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 재판도 없이 무더기로…시신 흔적까지 없애
수장 학살 과정은 이처럼 개인마다 다르지만, 비밀리에 자행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정식재판 없이 불법적으로 임의 처분됐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없다. 무더기 학살로 나중에 후환이 있을까 봐 청소하듯 시신의 흔적까지 없앤 것이다. 수장 학살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일본 대마도까지 대마난류를 따라 시신이 떠밀려온 사실을 안 뒤 지난 2014년부터 3차례 위령제를 열고 있는 일본인 나카타 이사무(71) 한라산회 고문은 4‧3수장 희생자를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말살당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살았다는 걸 증명하는 거라 생각한다. 지금 대마도에 수장 학살 희생자 시신 수백 구가 표착이 됐는데, 살았다는 기억조차 누가 없애 버렸다. 이렇게 먼 타국에 버려져 있다는 것이 4‧3 사건의 잔인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김수열 시인은 <물에서 온 편지>라는 시에서 4‧3 수장 학살 희생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없듯이 /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없어 / 그게 슬픔이구나 / 봉분 하나 없다는 게 서럽구나 안타깝구나 / 그러니 아들아 / 바람 불 때마다 내가 부르는가 여기거라 / 파도 칠 때마다 내가 우는가 돌아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