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연기를 시작했으나 뜻하지 않게 영화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던 김희애는 이 '늦게 트인 인연'을 반가워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야외 무대인사에서 "오히려 배우로서 좀 더 무르익고 성숙했을 때 스크린에 담겨지는 연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쭉 이대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밝혔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김희애는 '사라진 밤', '허스토리', '윤희에게'까지 총 세 편의 주연작으로 관객을 만났다. 차기작도 찍고 있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다. '현역'으로 영화와 드라마를 활발히 오가는 김희애는 여전히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로 꼽히지만, 정작 본인은 이 모든 것이 기적이고 덤이라고 여겼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희애는 "저는 항시 이번이 마지막이란 얘기를 했다"라며 "정말 기적적으로 버틴 거다.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주인공을 한다거나, 멜로에 나온다거나 이런 건 상상도 못 했다"라고 말했다.
지금보다 콘텐츠 제작 환경이 매우 열악했던 과거에는 일하기 싫고 불만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요즘은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단다. 늘 두말할 필요 없는 연기를 보여줬고 '윤희에게'에서도 그랬던 김희애는 "인제 좀 연기의 재미를 안다"라고 답했다.
◇ 의외의 코믹함이 돋보이는 '모녀 케미', 애드리브는 없었다
'윤희에게'의 윤희(김희애 분)는 전남편(유재명 분) 사이에서 낳은 고3 딸 새봄(김소혜 분)이 있다. 모녀 둘 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게 살갑게 말하거나 행동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다고 여기며 연기했냐고 묻자, "아무래도 저만큼 상처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엄마 보호 속에 있으니 그늘은 없을 것 같다. 윤희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해서 그늘이 있지만"이라고 답했다.
'윤희에게'는 천천히 흘러가는 잔잔하고 담백한 영화이면서도, 웃음 터지는 부분이 종종 나온다. 윤희-새봄 모녀가 주고받는 대화가 분위기를 좀 더 발랄하게 환기한다. 엄마가 자신의 흡연과 이성 친구 교제 사실을 아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새봄의 반응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김희애는 "애드리브 하나도 없었다.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다. 놀라웠다. 젊은 남자 감독이 모녀의 심리를 따라갈 수 있을까 했는데 참 희한하더라. 갑자기 담배 한 대 달라고 해 가지고 비밀을 얘기하려나 했는데…"라며 웃었다.
공식석상에서 이미 여러 차례 김소혜를 칭찬한 바 있는 김희애는 "(김소혜가) 많은 역할을 한 건 못 봤지만 그 분야에선 최고다. 한국말로 하는 건 최고다. (영화에서) 되게 중요한 역할이지 않나. 할리우드 배우 데려와도 그만큼 못할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 '윤희에게'를 한마디로 자랑한다면
시간과 추억이 누적된, 애틋하고 애틋한 윤희와 쥰(나카무라 유코)의 재회를 연기하기 까다로웠다는 김희애. 그러나 연기하는 것이 직업이니 작업하면서 어려움을 만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게 배우"라며 "저희 영화는 더 짧다. 그런데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게 있어서 늘 긴장 속에서도 잊지 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상기시켰다"라고 말했다.
제일 만만치 않게 느껴졌던 장면도 쥰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김희애는 "그게 가장 겁났고,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몰라서 긴장했다"라면서도 "이 영화의 톤이 좋다. 쥰이 손님에게 '난 이런 비밀이 있는데 너도 비밀을 갖고 있다면 말하지 마'라고 우회적으로 말한다. 우리도 보통 우회적으로 하지 직설적으로 안 하지 않나. 그런 범주에서 과하지 않은 톤이, 전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윤희에게'를 자랑해 달라고 부탁하자 "뭐라고 한마디 하면 좋을까…"라고 하다가, "정말 제가 정성으로, 마음을 준비해서 한 연기를 보실 수 있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다"라고 답했다. 타이틀롤로서 책임감이 무거울 것 같다는 질문에는 "책임감은 이런 거다. '제가 잘해야겠다!' (제가 선배여서) 일할 때 (특별한) 부담은 없다. 다 각자의 위치에서 동업자로 하는 거다. 소혜는 소혜대로, 각자 위치에서 자기 일을 하는 거지"라고 전했다.
◇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거로 너무 만족"
김희애는 20년째 같은 스태프들과 일하고 있다. 어떤 자리에선 "김희애가 뭔데 스태프들이 저렇게 좋아?"라는 말도 들어봤다고 한다. 평소 사람을 사귈 때 좁고 깊게 사귀는 편일까? 김희애는 "좀 그런 편인 것 같은데 안 그러고 한다. 상처받는다. 얇고 넓게 해야 한다"라고 농담을 해 웃음을 유발했다.
김희애는 "저는 슬럼프… 크게 그런 건 없었다. 아이 키워야 해서 7년쯤 뜸했었다. 슬럼프란 뭘까. 그냥 보통 삶의 한 부분 아닐까. 삶은 지금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슬럼프, 실패, 성공, 상처 이런 게 다 하나로 모아진 게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그거 없이 인생을 살아낼 수 있나? 그거 없는 인간이 어떻게 연기를…"이라며 "(배우는) 상처도 받고 외로움도 느껴보며 혼자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게 너무 필요한 것 같다"라고 밝혔다.
슬럼프가 없었다면, 절정은 있었을까. 김희애는 "지금이 가장 절정이라고 하면 되게 서글퍼진다. 앞으로 살날이 많은데… 그냥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거로 너무나 큰 만족이다. 또 제가 20년 전에 지금 활동할 걸 예상 못 했듯이, 20~30년 후에 배우로서 어떻게 생명 이어갈 수 있는지 모르니 그 말은 아끼겠다"라고 답했다.
"그냥, 되게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기적이죠. 정말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전 항시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짜로. 근데 계속 (일이) 연결돼서 덤이라고 생각해요.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어리고 철없을 때는 일도 하기 싫고 빨리 끝냈으면 했죠. 그땐 너무 힘들었거든요. 제작환경도 주먹구구식으로 하고요. 그땐 화창한 날씨에 '내가 촬영장에 왜 있나?' 그랬는데, 며칠 전에 낙엽 지는 데서 촬영하는데 젊은 후배들이 너무 잘하는 거예요. 속으로 '야~ 너 멋있다!' 했어요. 얘는 왜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거야? (웃음)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면 (배우로서) 경력이 단절되잖아요. 끈을 놓지 않고 했더니 이런 멋진 순간이 있구나, 해서 정말 일을 즐기게 되더라고요. 카메라 앞에 서면 수많은 분들이 보잖아요. 그게 너무 감사하게 느껴져요. (예전엔) 뜻대로 안 되니까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오히려 인제 좀 연기의 재미도 알고요. 좀 더 길게 본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김희애가 감탄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누구일까 궁금했다. 현재 촬영 중인 '부부의 세계'에 나오는 배우 이학주였다. 김희애는 "딱, 자신감 있더라. 살벌하게 하더라, 연기를. 나중에 한 번 보세요. 씬 스틸러일 것 같다"라고 부연했다.
올해로 데뷔 36년을 맞은 김희애. 인생의 절반 이상을 배우로 살았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하고 싶을까. 그는 "그런 운이 주어진다면!"이라고 답했다가 이내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자유롭게"라고 덧붙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