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가 '윤희에게'(감독 임대형)에 참여한 결정적 이유는 '재미있어서'였다. 시나리오는 한 권의 소설책 같았다. 뒤 내용이 궁금해져서 한 장 한 장 읽었다. 시나리오에 만족했기에 작은 역할이어도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하게 받아들여지는 성격의 로맨스라는 점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김희애에게 그 점은 "하나의 작은 소재"였다. 오히려 딸 새봄(김소혜 분)과 여행을 떠나는 로드 무비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소재의 압박을 크게 받지도, 이와 관련해 걱정하지도 않았다. 김희애가 언론 시사회 때 밝힌 '윤희에게' 참여 배경이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김희애의 라운드 인터뷰가 열렸다. 그는 이 자리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윤희에게'에 매료된 배경을 전했다. 이 작품에 출연했을 때 관객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야기가 지닌 재미가 더 크고 셌기에.
걱정거리는 따로 있었다. 20년 넘게 헤어진 채로 볼 수 없었던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에 대한 감정을, 한정된 짧은 시간 안에 충분히 끌어 올릴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또한 김희애는 '윤희에게'를 MSG를 치지 않은 된장찌개로 비유하며 "장사가 잘되어야 할 텐데…"라며 웃었다.
◇ 순수하고 재미있는 시나리오
김희애가 감성적인 멜로로 돌아온다는 소식은 올해 1월 전해졌다. 당시 제목은 '만월'이었다. 일찍 출연을 확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시나리오가 좋아서였다.
그는 "재밌었다. 그냥 제가 어떤 배우로서, 이 역할에서 어떻게 보일지 이런 생각을 전혀 안 하게 만든 책이었다. 그냥 한 권의 소설책 읽듯 읽게 됐다"라고 밝혔다.
이어, "음식에도 MSG가 들어가야 맛있지 않나. 된장찌개도. 근데 과연 이렇게 안 넣어도 될까, 이렇게 팔아도 될까 할 정도로 순수했고 그래서 저도 참여하게 됐다. 근데 장사가 잘돼야 할 텐데… 된장찌개가 좀 팔려야 할 텐데…"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너무 좋은 작품도 많고, 멋진 작업도 많지만, 저에게 주어진 건 어쨌든 한정적이잖아요, 더 좁고. 저는 기준 이상만 된다면, '이건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 해요. 그렇지 않으면 5년, 10년에 하나씩밖에 할 수 없잖아요? 제겐 이 영화가 되게 가뭄에 단비… (웃음) 다양성이 있어야 정상적이지만 쉽지 않잖아요. 이런 영화가 나오기는.
어떤 자극적인 게 아니고 정말 순수 문학처럼, MSG 안 친 것처럼 순한 마음으로 쓰셔서 저는 기꺼이 참여하게 됐어요. 지난번 시사회 끝나고 리뷰 좀 읽어봤는데 (웃음) 긍정적으로 평가해 주셔서… 음식으로 비교하면 화려한 레스토랑도 좋지만 어느 시골에 주인 색깔이 진한 작은 식당이 있잖아요. 블로그에는 안 나와 있지만 발견하면 되게 뿌듯하잖아요? 그런 마음이랄까요.
저희 영화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큰 주제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소소하게 풀어간 게 굉장히 매력적이고 크게 다가왔는데, 리뷰에 그렇게 저와 공감하고 쓰신 걸 보고 되게 반가웠어요. 절반은 성공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 표현이 크거나 잦지 않은 '윤희'를 표현하기 위해
'윤희에게'는 첫사랑의 편지를 받고 딸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윤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지만, 막상 윤희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펼쳐지지는 않는다. 오빠(김학선 분) 소개로 공장 급식실에 다니고, 이혼한 전남편(유재명 분) 사이에서 낳은 고3 딸이 있으며, 여간해선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를 알 수 있다.
김희애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다 소중하지 않나. 누구는 주인공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투명 인간처럼 자기 인생을 부정당하는 게 참 안타깝다"라며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윤희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감정이 계단처럼 쌓여가면 좋을 텐데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김희애는 '혼자서' 마음속으로 계속 준비운동을 했다. 마음에 와닿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거나 영화와 책을 보며 담금질하며 '윤희'를 만들어갔다.
연기하기 쉽지 않았지만, 김희애는 자기 힘으로 답을 구하고자 했다. 이번 작업을 하며 감독과 어떤 얘기를 나눴냐는 질문에 "제가 그런 작업을 잘 안 한다"고 즉답했다. 일하면서 방향을 정하는 건 본인 몫이었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쭉 그래왔다고 부연했다.
"어떤 생각이 드냐면요. 그 작품을 쓰는 데까지는 감독님의 창작물인데, 제 분야에 넘어오면 이건 또 제 창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에 답이 없잖아요. 어떤 게 나올지 모르죠. 방향을 잡아주고 저한테 팁을 주시는 건 좋지만, 그건(연기는) 제가 치러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안 물어봐요. 그게 의외로 더 좋은 답이 나올 수도 있거든요. 정말 궁금하고 모르겠는 게 코앞에 닥치면 여쭤보지만, 그분은 또 결재해야 할 게 너무 많잖아요? (웃음) 수많은 배우가 다 그렇게 물어온다면 감독님은 용량 초과가 될 거예요. 그래도 제가 딴 쪽으로 간다면 말씀하셨을 텐데 안 하셨어요."
"일단 제가 윤희가 되어야 했어요. (제가) 충분히 이해되어야 보는 분들도 충분히 감정 이입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쥰과 만나는 부분, 그 부분에 제가 가장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최대한 감정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봤죠. 잘 집중할 수 있었어요. 감독님 책이 잘 받쳐줬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 기억에 남았던 '너무 따뜻한' 리뷰
윤희와 쥰의 만남 뒤에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윤희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거듭 써 왔던 쥰을 보고, 그의 고모 마사코(키노 하나)가 편지를 보낸 것이 출발이었다. 그 편지를 먼저 본 새봄은 엄마와 함께하는 여행을 준비한다. 엄마를 첫사랑과 만나게 해 준다는 딸의 깜찍한 계획을 몰랐으나, 윤희는 혼자서 쥰의 집을 찾아간다. 윤희가 쥰을 피해 몸을 숨긴 탓에 둘은 마주치지 못하지만.
두 사람은 새봄이 마련한 이중 약속 덕에,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다. 대화는 짧다. 서로가 윤희이고 쥰인지를 확인하는 간단한 인사만 나눌 뿐이다. 한 기자가 '아무것도 안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묻자 김희애는 "인생에 결론이 있을까? 다 현재 진행형이다. 죽을 때까지 모르지 않나"라며 "인생의 한 부분을 잘라내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영화의 문을 열고 닫는 편지 내레이션에 관해선 "너무 감정에 몰입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너무 드라이하게 읽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감정에 맡기고 여러 버전으로 읽었다"라며 "정신줄을 꽉 잡았다"라고 웃었다.
노래를 들을 때도 가수가 감정에 차 있는 것보다는 담담하게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김희애는 "최대한 감정을 꽉 붙잡고" 내레이션을 했다. 그는 "연기가 너무 돌직구면 일차원적인 것 같다. 조금 자기 속에서 생각하고 나오는 감정이 맞다고 생각한다"라고 웃었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사랑에 관한 가치관이나 생각이 달라진 게 있냐는 질문에, 김희애는 "어쩌면 센 주제인데도 일상처럼 흘러가는 스토리인데 저는 그걸 귀하게 생각했다. 놀랍게도, 보시는 분들도 어떤 선입견 없이 그걸 발견해 주신 게 너무 신기하다. 깜짝 놀랐다, 솔직히. 너무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라며 미소를 띠었다.
"리뷰에서 기억나는 말 중 하나는… '어떤 사랑이라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영화'라는 건데, 너무 따뜻한 시각으로 봐주신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어요. 어떤 존재도 다 귀한 거 같아요.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귀하고 이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는데 어떤 인생이 소중하지 않겠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