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국민이 주인인 나라', '나라다운 나라 건설'을 기치로 첫발을 내딛었던 문재인 정부는 이제 집권 반환점을 돌며 냉혹한 칼날 위에 섰다. 소득주도성장으로 대표되는 경제운용정책은 글로벌 경기 하강과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으로 국민 체감과 괴리되면서 '경제정책 실정' 논란으로 비화됐다. '공정의 가치'는 조국 전 법무장관 가족에 대한 검찰 수사로 빛을 바랬고 대통령마저 "깊이 성찰하겠다"며 유감을 표했다.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듯했던 한반도 비핵화 역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과 스톡홀름 실무회담에서 별 성과를 내지 못하며 공전 중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은 집권 2년 6개월에 어떤 성과를 더 낼 수 있을까? CBS노컷뉴스는 과거 정부와 달랐던 남북관계 개선 의지와 한계, J노믹스로 대표되는 경제정책, 야당과의 협치 실종 등 문재인 정부의 지난 2년6개월을 6부작으로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공기처럼 다가온 남북 평화'…진전이냐 퇴보냐 최대 분수령 ② 실현되지 않는 '협치…여야정 상설협의체 1년째 '표류 ③ 공정이라는 국민 기준에 '화들짝'…공정개혁 통한 민심회복에 '올인' ④ 사라진 소주성…J노믹스 '절반의 성공' ⑤ 공수처·수사권 조정 검찰 개혁 정면돌파 승부수 통할까? ⑥ '우향우' 선택한 문재인표 '노동자정부' |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해고 수납원 노동자들은 지난 7일 국토교통부 김현미 장관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점거 농성을 시작하는 한편, 일부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에서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같은 날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달 청와대 이호승 경제수석이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노동자에 대해 '없어질 직업'이라고 발언한 데 대해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잘못된 발언"이라고 해명했다.
#장면2
한국노총 김주영 위원장은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안별로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독자적인 대화 채널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2기 경사노위도 쌓여있는 숙제의 무게에 비해서 발걸음은 더디기만 하다"며 "정부는 노동존중을 내세우고 사회적 대화를 강조해 왔지만 아직까지 노동자와 서민 대중들에게 강한 느낌표를 주지 못하고, 여전히 노동정책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장면3
지난 달 22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회 연설문에 '노동'이라는 단어는 단 한 글자도 언급되지 않았다.
'근로'가 언급된 횟수는 4차례로, 그 중 2번은 근로소득 증가율에 대한 평가와 근로장려금 확대 효과에 대한 얘기였다. 나머지 2번은 근로시간 단축 확대 시행에 따라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등 관련 입법이 시급하다는 내용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이 보수화됐다는 주장은 이제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얘기다.
불과 최근 20일새 연이어 나타난 위의 세 장면은 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어떤 상황이고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그리고 왜 이리 변했는가를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했던 '노동존중사회'라는 구호는 오래된 약속이다. 이미 2012년 대선 당시부터 문 대통령은 노동정책을 포괄하는 단어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제시했다.
2017년, 문 대통령은 취임 후 결정한 첫 외부일정에서도 인천공항공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직접 만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약속했다.
과거 1세대 노동변호사로 활약했던 문 대통령답게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친노동' 행보를 보였던 만큼 집권 초기 노동 정책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로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꼽을 수 있다. 이화여대 이승욱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역사상 정부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대규모로 전환한 최초 사례"라며 "고용의 안정성, 지속성 관점에서 획기적인 노동정책"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3년내 최저임금 1만원 달성' 공약 아래 최저임금은 2년 연속 두자릿수 인상률을 기록하며 약 29% 올랐다. 그동안 정치적 변화나 여론에 요동치던 최저임금을 안정적으로 인상하기 위한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작업도 추진됐다.
'저녁이 있는 삶'도 주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 확대시행으로 '워라밸'이 현실화됐다. 실제 지난해 국내 5인 이상 사업체의 노동자 1인당 연간 노동시간은 전년보다 28시간이나 줄어든 1986시간으로, 사상 처음으로 연간 노동시간이 2천 시간의 벽을 뚫었다.
정부가 삼성전자 직업병 집단 발병 사태에 대해 작업환경보고서를 공개하라며 정면으로 다루는 등 진전된 모습을 보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비록 지난 8월 수원지법이 삼성전자 작업환경보고서 공개결정을 취소하라고 판결했지만,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의 직업성 암 관련 산업재해 절차를 간소화하고 사업장 안전보건자료를 기업과 공유하는 등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노동계가 '양대 지침'과 '성과연봉제'를 폐기하고, 노동 적폐 정책을 해소하기 위한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를 가동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노동 정책을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 사회적 대화 복원에도 공을 들였고, 그 결과 기존 노사정위원회를 대체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출범했다.
하지만 임기 반환점을 도는 지금,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정책은 끊임없이 '우향우' 행진을 반복해왔다.
단적인 예가 정규직 전환 문제다. 정부는 공공부문의 정규직 전환 사업을 '마중물'로 묘사하며 민간 부문의 변화도 유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굵직한 공공기관들이 직접 고용 대신 자회사를 통한 간접 고용을 선택하면서 이른바 '중규직' 논란에 휩싸였다.
정작 민간 부문의 정규직 전환이나 비정규직 감축을 위한 정책은 거의 추진되지 않았다. 국정과제에서 직접 언급했던 핵심 대책인 '비정규직 사용사유제한 제도'는 정부 '비정규직 대책 TF'에서는 결론 없이 경사노위로 관련 논의를 넘겼고, 경사노위는 공식기구 대신 단순 연구모임에서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수납원 사태는 정부의 정규직 전환 의지가 사라졌다는 신호를 민간 기업들에게 준 결정타가 됐다.
민주노총법률원 권두섭 변호사는 "반대 목소리가 있어도 대법원 판결을 명분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안인데도 직접 고용을 회피하고 있다"며 "공사가 직접고용을 거부하는 마당에 민간 부문에 정규직 고용을 권유할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최저임금 인상은 문 대통령이 직접 공약 폐기를 선언했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까지 최저시급 1만원을 달성하려면 남은 2년 연 평균 7.9%씩 올려야 하지만, 현재 여론을 감안하면 이조차 쉽지 않다.
게다가 이미 지난해 5월 국회가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확대하면서 실제 임금 인상폭이 감소한 걸 감안하면 2017년 대선 당시 보수야당 후보들조차 약속했던 5년내 최저임금 1만원 달성조차 이루지 못하게 된 셈이다.
주52시간제는 유예기간을 명분으로 도입이 늦춰지면서 효과가 반감된데다, '시장이 요구한다'는 이유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등 이른바 '보완입법'을 통해 장시간 노동이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한 ILO(국제노동기구) 핵심 협약 비준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정작 박근혜 정부 시절 해직교사를 조합원에 포함했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통보된 법외노조 문제에 정부는 관련 법 개정이 우선이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동안 사회적 대화는 파탄 지경에 놓였다. 노동정책 우경화 조짐에 민주노총이 일찌감치 불참을 선언한데다 탄력근로제 합의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1기 경사노위가 해체됐고, 2기 경사노위를 꾸리고도 사회적 대화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경사노위 무력화'의 책임 중 상당 부분이 정부에 있다는 점이다. 이미 정치권에서 사실상 합의를 내렸던 탄력근로제나 ILO 협약 비준·사용사유 제도 등은 정부와 여권이 직접 추진할 수 있는 사안인데도, 굳이 경사노위를 거치도록 해 '명분쌓기용 들러리'로 삼았냐는 비판도 나온다.
게다가 최근 국제경기가 하락세를 보이고 투자 및 고용 관련 거시 지표가 악화되면서 이러한 '우경화' 움직임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성공회대 하종강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실제 친노동 정책 혜택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문 대통령조차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대통령의 생각도 많이 돌아선 것 같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정부 노동정책이 우경화된 배경에 대해 '노동존중사회'라는 목표가 정부와 여권에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 변호사는 "지난해 대법원에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할 권리에 대해 굉장히 전향적인 판결이 잇따라 내려졌는데, 정작 정부 태도에는 진전이 없다"며 "정부가 법 개정 등을 시도했지만 보수야당의 반대로 실패했다면 이해하겠는데, 정부 스스로 할 수 있는 부분에서도 최소한의 진전조차 사라졌다"고 비판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이사장은 "집권 초기 청와대에서 노동정책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은 문 대통령 혼자라는 얘기가 많았다"며 "정부, 여권 안에서 노동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반드시 추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 없었다"고 꼬집었다.
노동 정책에 대한 큰 그림을 공유하지 못한 채로 무리하게 '위로부터의 변화'를 추진한 바람에 정책 간의 연계성을 고려하지 않아 정책 수용성을 정부 스스로 낮췄다는 비판도 나온다.
최저임금은 급격히 올렸지만 중소기업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공정사회' 개편 작업이 동반되지 못하면서 '을 대 을' 상황을 부른 것이 대표적인 예다.
부경대 황선웅 경제학과 교수는 "저소득계층을 위해 ILO 핵심협약 비준을 통해 노동기본권을 보장해서 스스로 노동조건을 바꿔야 했는데, 최저임금을 한번에 일거에 올렸다"고 설명했다.
이어 "집권 초기 변화를 보면 근본적인 법 제도 변화보다 특정 위원회의 결정이나 대통령의 지시로 갑작스레 추진된 사례가 많다"며 "근본적인 법, 제도의 변화를 통한 점진적이되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했는데, 한번에 바꾸려다 경기 침체 등 역풍을 맞자 곧바로 관리 미숙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도 "예컨대 근로시간을 줄이겠다면 관련 보완책까지 패키지로 접근해야 했는데, 이슈에 휘둘려 접근했다"며 "탄력근로제와 근로시간 단축, 노동3군 핵심협약 등을 한번에 다뤘다면 노사 간의 균형이 맞았을텐데, 분리해서 다루니까 노사 양측에서 반대를 받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하반기에는 개별적 이슈파이팅이 아닌 정책 패키지를 꾸려 종합적, 체계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대외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노동존중사회라는 지향점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은 임기 하반기 동안 '초심'을 회복하고 '노동존중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 대통령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왔다.
이 교수는 "필요하다면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로 양대노총 위원장과 경영계 대표를 불러 직접 노사정 대화를 주재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결국 사회적 대화는 국민의 공감대를 넓히는 작업인데, 이를 청와대가 좀 더 주도하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 교수는 "열쇠는 대통령이 갖고 있다.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아직 바꿀 것이 많다"며 "일부 시민들은 왜 노동자들은 비판만 하느냐고 하지만, 대통령이 노동자, 서민의 비판을 동력으로 끌어안고 반발을 돌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편 여권과 정부에만 책임을 넘기기 전에 노동계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도 나온다.
김 이사장은 "선거 국면은 노동 이슈가 의제로 정리되고 심도 있게 논의되는 기회"라며 "내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계가 핵심 노동 의제를 재점검하고, 새롭게 이슈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