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정겨운 뽀글머리 파마를 한 미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단정한 수트에 생머리로 나타난 배우 장혜진은 그가 이전 인터뷰에서 줄곧 강조했던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 그 자체였다. 아우라를 뽐내는 배우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다가도, 그게 잘되지 않으니 대중에게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다고 털어놓는 그는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니나 내나'(감독 이동은)의 미정 역 배우 장혜진을 만났다. 5월 개봉한 봉준호 감독 신작 '기생충' 때 매체 인터뷰를 거의 처음 해 보았다는 그에게 이제 좀 인터뷰가 익숙해졌냐고 물었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직접 말하지 않은 부분이 마치 본인의 발언인 것처럼 나간 인터뷰가 있어서 당황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관객과 시청자들이 잘 모르는, '낯선 배우'에서 천만 영화 '기생충'을 거치며 배우로서 장혜진의 위치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혜진은 "그저 꾸준히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할 뿐이었다. "앞으로는 말 조심히 하고, 잘 정리해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다 떨듯이 하지 말고"라는 다짐도 덧붙였다.
◇ 자극적이지 않고 따뜻한 '니나 내나'
장혜진은 지난달 17일 열린 언론 시사회에서 '니나 내나' 시나리오와 그래픽 노블을 받았을 때 한 번에 술술 읽혔고 인물들에게 공감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정이라는 역할을 제안받아 시나리오를 처음 마주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재차 물었다. 장혜진은 "되게 공감이 가고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라며 "눈물이 나기도 했다"고 답했다.
'니나 내나'는 오래전 집을 떠난 엄마에게서 편지가 도착하고, 각자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삼 남매가 엄마를 만나기 위해 여정을 떠나며 벌어지는 용서와 화해의 시간을 그린 이야기다. 장혜진은 어린 나이부터 엄마 노릇을 도맡아 오면서도, 늘 자기 때문에 가족이 해를 입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신내림을 받으려고 하는 첫째 미정 역을 연기했다.
'니나 내나'는 '가족 영화'인 만큼,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성이 도드라졌다. 미정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생 경환(태인호 분)과 재윤(이가섭 분), 딸 규림(김진영 분)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그의 답을 정리하면 이렇다. 나이는 미정이 더 많지만 더 오빠 같은, 든든하고 묵묵한 사람이 경환이다. 재윤은 가장 요즘 젊은이 같고, 작가라서 예민한 면도 가졌다.
규림은 부모님 때문에 상처받았던 본인의 과거, 그때 느꼈던 감정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었던, 뭐든 다 해 주고 싶은 딸이었고. 아이들은 어리니까 뭘 모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러면 안 된다며, 사실 서너 살만 되어도 자기 생각과 자아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린 시절 아이들을 두고 나간 엄마 때문에, 일찍이 엄마 노릇을 겸해야 했던 미정은 엄마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떤다. 그만큼 원망과 속상함이 사무쳤기 때문이리라. 뜻밖에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맞닥뜨리고 나서는, 속에 있던 응어리를 꺼낸다.
이 같은 감정에 공감할 수 있었냐고 질문하자, 그는 "자식을 버리고 떠나갔으니까 (엄마가) 미웠을 것 같다. 물론 엄마도 힘들었겠지만 자식 입장에선 우릴 버리고 간 거니까"라면서도 "미정의 꿈이긴 하지만 나중에 산책하면서 화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라고 말했다.
◇ 장혜진이 새긴 대사와 장면들
'니나 내나'에는 부러 멋 부린 대사가 없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살아가며 나도 한 번쯤 입 밖으로 내 본 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장혜진의 기억에 남는 대사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대사를 줄줄이 읊었다.
재윤과 미정이 말다툼할 때 재윤이 한 "내가 내 생각하지. 그럼 누가 내 생각하노", 미정의 대사인 "사는 게 다 달라 보여도 그래 다 비슷비슷하다고, 니나 내나", 아이 낳는 아내 상희(이상희 분) 곁을 지키지 못한 경환이 흐느끼며 하는 "내 진짜 우리 아버지처럼 안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미안하다"가 그 주인공이었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칼국숫집에서 서울말을 하는 장면도 꼽았다. 장혜진은 "거기서 서울말 하는 장면은 원래 대본에는 '서울말'까지만 돼 있었다. 뒤에 태인호 씨랑 한 건 다 애드리브다. 너무 재미있었다"라며 웃었다.
장혜진은 또한 바이킹 타는 장면을 들며 "진짜로 무서웠다. 원래 잘 못 탄다. (그 장면에서 제 감정이) 더 잘 나타났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꼽은 것은 다시 칼국숫집에 들렀을 때 김치를 먹으며 울컥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김치라고 하니까 더 애틋했을 것 같다"라고 밝혔다.
엄마를 만나기 위해 파주로 갔던 그 여행 후 가족 관계가 어떻게 변했을 거라고 예상하는지 묻자, 장혜진은 "엄청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조금 더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는 됐을 것 같다"라고 답했다.
이어, "재윤이도 쓰는 소설이 대히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결과를 내지 않았을까. 경환이도 사진 일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 같고. 연락도 좀 더 하고. 경환이가 아기도 낳았으니까. 원래 아이가 생기면 더 자주 보지 않나, 돌잔치도 있고. 그래서 좀 더 자주 볼 것 같다. 또 재윤이가 연락이 안 되어도 경환에게 연락해서 전화 안 받는다고 하소연하지도 않을 것 같다"라고 전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