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알 제작진은 "윤씨의 자필 진술조서는 13번에 걸쳐 작성됐고, 10여장의 진술서에는 형사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고 밝혔다.
윤씨도 그알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형사들이 불러준 대로) 받아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윤씨의 재심 변호인을 맡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도 "자필 진술서를 보면 윤씨의 필체가 아닌 것도 있다. 수사 관계자나 누군가 대필한 진술서를 봤다"며 윤씨의 자백이 조작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이어 "이춘재 자백은 영상녹화가 돼 있고, 이춘재만 알 수 있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는 자백이 들어있다고 한다"며 "이춘재의 이전 범행과 연결시킬 수 있는 비밀의 폭로가 있다"며 8차 사건의 범인이 윤씨가 아님을 확신했다.
그알 제작진은 윤씨의 자필 진술조서가 당시 사건 현장에 비춰 신빙성이 있는 지 검증해 나갔다.
1989년 7월 26일 작성된 진술조서에는 '(윤씨는) 자정 무렵 혼자 농기구 수리점을 나와 진안 3리를 거쳐 진안 1리에 있는 피해자의 집까지 걸어가 강간 살해를 한 뒤 새벽 4시경 귀가했다'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윤씨가 일하고 있는 농기계 수리점 사장은 "농기계를 잃어버리고 나서 제가 굉장히 예민했다. 인기척이 들리면 바로 깨는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공장 문을 열고 닫을 때 큰 소리가 나는 데 듣지 못했고, 당시 윤씨의 손과 옷에는 농기계 수리로 인해 기름때가 범벅이었지만 피해자의 옷과 집에서는 기름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 그알 제작진은 소아마비로 왼쪽 다리가 불편한 윤씨가 자신의 얼굴 높이의 담을 넘었다고 쓴 부분을 지적했다.
윤씨는 진술서에 '담을 넘을 때 먼저 손을 잡고 오른발을 먼저 올려놓은 다음, 다른 한쪽 손을 올려놓고 왼쪽 발을 올려 넘어갔다'고 적었다.
윤씨는 이에 대해 "현장검증할 때 담을 못 넘어서 형사들이 양옆에서 부축해 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수사 형사들은 윤씨가 어렵지 않게 담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사회심리학과 박지선 교수는 윤씨가 진술서에 쓴 범행 동기가 너무 장황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윤씨가 말하는 범행 동기는 지나치게 길고 장황하다. 윤씨가 범죄자라는 것을 믿는 누군가가 자세하게 설명하듯 들린다"며 "그런데 이 사건은 목적이 뚜렷하다. 강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자세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마치 이미 죽어있는 사람을 두고 진술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알 제작진은 사건 당시 윤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 결정적 증거가 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분석 결과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 경찰은 사체에서 발견된 체모 분석 결과, B형이라고 밝혔다. 중성자 방상화 분석법 검증 결과 농기계 수리공이었던 윤씨로 확정지었다.
하지만 2019년의 전문가는 "용접공 보다는 오히려 전기 회사에서 근무한 이춘재가 근무했던 작업 환경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분석했다.
감정서를 본 윤씨는 "황당하다. 당시 화성군만해도 용접하는 사람이 50명도 넘었다"며 "뭐가 나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감정 결과서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기들끼리 짜맞추기 한 거다"고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한 주택에서 박모(13) 양이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방사성동위원소 감별법으로 체모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을 분석했고, 경찰은 국과수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윤씨를 범인으로 검거했다.
윤씨는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을 확정받아 복역하던 중 감형받아 수감 20년 만인 2009년 가석방됐다.
하지만 이춘재가 8차 사건을 자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데다 윤씨 역시 당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들어 재심청구 의사를 밝히면서 경찰의 부실 수사가 도마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