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 감상평
이진욱 기자(이하 이) : 조커라는 널리 알려진 악당, 시대의 악당 캐릭터를 빌려와 시대의 모순에 관해 이야기했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다. 그렇기에 대중과의 접점도 더 넓어졌던 것 같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미래의 이야기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극 중 '잃을 것이 없게 만드는 세상'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왔을 때 그 시대는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측한 '예견서'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감흥을 주는 것 같다. 지금 나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예측 가능한 미래에 대해서 이 길만은 가지 말자고 하는 듯한 영화랄까. 어떻게 봤나?
최영주 기자(이하 최) : 어둡고 격정적이면서도 위험한 영화. 불온하고 부조리하며 광적인 시대와 인간을 '아서/조커'를 통해서 돌아보고 질문하게 된다. 또한 아서에 대한 폭력과 조커가 행하는 폭력을 보자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속성에 관해서도 물음을 던지게 된다. 계속해서 관객을 영화로 끌고 들어와 현실에 대해 질문하게 했다고 본다.
이 : 조커는 악당 이후의 세계는 갖고 있었지만, 그의 탄생은 간략하게만 나왔다. '조커'는 완벽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사를 가졌다고 본다. 조커라는 한 인물과 조커 가면을 쓴 군중, 개인과 사회를 완전 병행시켜 이야기를 진행한다. 조커 개인의 아버지로 명명되는 존재인 토머스 웨인과 머레이 프랭클린에게 처음엔 기대고 바라지만 점차 아버지를 극복한다. 그 서사의 마지막에 아버지(머레이)를 살인 한 뒤 뒤집어질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부하면 서사적으로 영화가 가진 매력과 영화에 내포된 사회적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최 : 이 영화가 그리는 시기가 1981년이다. '고담(Gotham)'이란 말 자체가 뉴욕의 별칭인데, 1980년대 미국은 양극화가 심했다. 레이건 시대에서 기업에 대한 규제는 사라지고, 빈부격차는 극심해졌다. 실업률도 매우 높고, 사회복지가 축소됐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정신질환으로 상담을 받아야 했던 아서가 복지의 축소로 인해 그마저 잃게 된다.
이 : 지금 시대랑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호황을 누리다가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이후 경찰국가로서 가졌던 헤게모니에 금이 가고, 일본의 경제적 급부상을 경계한다. 그 과정에서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기에 이른다. 이후 복지 축소 등 소위 양극화의 바탕이 되는 기반들이 만들어졌다. 그런 과정이 쌓이고 쌓여 와서 지금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군중의 분노가 표출되는 과정까지 왔다는 걸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영화는 조커라는 악당이 탄생하고, 군중이 세상을 뒤집기까지 과정과 그런 미래가 오도록 놔둘 것인가 되묻고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지만 현재진행형이라 볼 수 있다.
최 : 1980년대에도 그런 상황이 있었는데, 역사는 반복된다고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걸 조커라는 악당의 현실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 조커라는 시대의 악당 캐릭터를 대입한 건 현명했다. 개인적으로 조커는 히틀러와 동격으로서 분명하게 겹친다. 개인으로서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자의 좌절, 반사회적인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 말이다. 히틀러가 대중적 인기를 얻고 파시즘과 나치즘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게 되는 과정이 조커를 통해 그대로 나타난다. 몇 년 전부터 일본의 우경화나 미국의 우편향화 과정에서 계속 우려했던 게 파시즘의 부활이다. 그런 지점에서 '조커'는 여전히 그런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고 본다.
최 : 영화를 보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지강헌 사건이 떠올랐다. 범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 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개인의 불만이나 분노라고 치부하기엔 당시 사회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낸 점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인지 '조커'는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이 : 영화는 고담시에 쥐 떼가 출몰했다는 뉴스로 시작한다. 뉴스에서 쥐 떼를 바라보는 시선과 자본가가 군중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치한다. 토마스 웨인이 출마를 선언하면서 군중을 쥐 떼처럼 골칫거리로, 쥐 떼와 다르지 않게 바라본다. 머레이가 '아서'를 대하는 태도 역시 수단으로 활용함을 볼 수 있다. 중간에 아서가 웨인을 보러 간 영화관에서 웨인을 비롯한 자본가들이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장면에서도 그런 게 드러난다. 채플린의 영화가 자본가를 풍자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영화인데도 말이다.
최 : 그것도 하필이면 '모던 타임스'(1936년)다.
이 : 자본가가 '모던 타임스'를 보면서 웃는 장면도 모순적이었다. 지금 기득권들이 더 이상 잃어갈 것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일관된 시각으로 계속 나타났다.
최 :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아서가 선보인 스탠딩 코미디 장면을 입수해 '머레이 쇼'에서 튼 거다. 그걸 보며 사람들이 웃는데 이건 사실상 조롱이고, 그것을 웃음으로 활용한다. 지금 사회도 혐오와 차별, 조롱을 웃음 코드로 활용한다. 이런 것들이 아마 영화 '조커'의 인기 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맞닿은 부분, 나와 사회가 맞닿은 부분 말이다. 조커는 분명 '빌런'이지만, 그가 처한 상황이나 사회적인 시선은 2019년의 현실과 다름없다.
이 : "이 영화가 범죄를 미화했다"는 주장은 기득권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사회 환경이 개인을 어떻게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절망의 상황으로 몰아넣는지에 대해서 뉴스를 통해 많이 봐왔다.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등 말이다. 군중이 조커를 응원하게 되는 과정에는 분명 그런 게 있을 텐데, 그것을 단순히 범죄 미화라고 확언해 버리면 본질을 못 보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접근할 수 없게끔 막아버린다는 느낌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그 표현은 경계해야 하지 않나 싶다.
최 :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통해 당시 사회적인 부조리에 대해 인식했고, 개선해야 하고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것도 있다. 단순히 범죄자가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말 정도로 치부하지 않고, 거기서 사회적 문제를 발견하고 나섰던 거다. 사실 '조커'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단순히 범죄자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거라고 한다면, '조커'가 가진 현실 반영과 문제 제기를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 예를 들어 '임꺽정'을 두고 "임꺽정이라는 도둑을 미화하는 소설"이라고 하면 어떨까. 소설을 통해 왜 그가 민초들을 대변하는 상징성을 갖게 됐는지, 당시 시대상이 왜 그랬는지 본질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임꺽정'을 범죄인 미화 소설이라고 하면 '조커'를 범죄 미화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것 같다. 영화에서 아서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성을 스토킹하는 과정에서 지하철을 타고 쭉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상하로 나뉜 고담시의 번화한 마천루와 본인들이 사는 허름한 곳을 지하철이 상승해 올라가는 장면인데, 부가 한쪽으로 쏠린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 : 그런 오르락내리락하는 이미지가 있다. 포스터에도 나온 계단은 뉴욕 브롱크스에 있다고 한다.(*참고: 브롱크스의 하이브리지와 킹스브리지 노동 계층 지역은 아서의 공동 주택이 있는 동네로 등장한다) 실제로 1970~80년대 브롱크스는 빈곤과 범죄 등으로 가득한 지역이다. 그러한 곳으로 가는 계단을 아서가 힘겹게 오른다는 것은 그 시대는 물론 현재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굉장히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전 영화와 달리 '조커'는 DC코믹스의 조커를 현실의 이야기 안으로 가져옴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게끔 한다.
이 : 현실적인, 극사실적인 이야기 안에 조커라는 코믹스 캐릭터를 가져온 건 대단한 한 수라고 생각한다. 조커가 악당이 되는 과정 등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런 거 하나하나를 퍼즐 맞추듯이 발견해가는 재미 안에서 사회 문제를 계속 짚어낸 건 이야기를 흡수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현명하고 영리했던 선택인 것 같다. 아까 계단을 말했는데,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는 아서, 그리고 나중에 '머레이 쇼'에 가기 위해 내려가는 장면이 대비를 이룬다.
최 : 조커로서 내려올 때는 배경음악도 록 음악으로, 옷도 원색적으로 화려하게 바뀐다. 조커가 된 그가 춤을 추듯 계단을 내려오는 걸 보며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서에서 조커로의 변화를 계단을 통해 보여주는 것, 지역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지까지 생각하면 더욱 재밌다. 어찌 보면 '조커'도 '기생충'처럼 자본과 양극화, 계급에 관한 이야기다. '기생충'은 폭우가 내리던 날 기택네 가족이 계단을 내려오며 자신의 현실은 계단 아래라는 걸 인지한다. '조커'에서는 계단의 이미지가 달리 나타나는 것 같다. 올라간다는 건 보통 상승의 이미지인데, 아서에게 오르는 건 현실을 직시하는 움직임이자 사실상 하강의 의미다. 올라간 끝에 펼쳐진 곳은 노동계급의 현실이다. 내려오는 건 하강의 이미지인데, 오히려 아서는 내려오면서 아서를 벗어던지고 조커로 변화한다.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안티 히어로로서의 변화가 하강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 차이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이 : 희극, 비극 하니까 생각나는 게 보통 연기 잘하는 배우들에게 코미디 영화를 대하는 자세를 물어보면 그런 대답을 많이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 안 하고 연기했다"고 말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 자체는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하는데, '조커'도 그렇다. 아서가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서 유리문에 부딪히는 장면은 슬랩스틱 코미디로서 솔직히 웃음이 나오긴 했다. 그런데 그가 처한 상황을 보면 함부로 웃을 수 없다. 영화는 그런 면에서 떡밥을 많이 깔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줬다.
최 : '모던 타임스'를 보면서 상위 1%들이 웃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웃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그들이 보는 영화 속 주인공이 찰리 채플린이라는 것도 재밌는 상징 중 하나다.
이 : 그렇다. 자본가들이 소위 기층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따라서 기득권이 유지될지, 끝날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1970~80년대 동서냉전이 세계의 중심축일 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마르크스를 통해 공산주의 출현이 예견됐기 때문이다. 자본가도 공산주의를 공부해 수정자본주의가 나타나고, 공산주의 출현이 힘을 잃었다. 지금 시대 문제를 자본가들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져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조커'는 그 끝을 예견하고 있는 하나의 시나리오라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강자의 시선이 계속될 때 반대급부로 무엇이 올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 : 그들이 찰리 채플린이라는 노동 계급의 문화를 단순히 코미디로서 소비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이어지는 현상이다. 그들이 '모던 타임스'를 보면서 웃듯이, 영화 속 현실에서도 사람들은 아서를 보며 웃고, 조롱한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현실과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영화를 보며 웃고, '조커' 속 사람들은 다시 아서를 보며 웃는 이 모습이 현실에서 반복된다.
최 : 관객은 아서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보니까 입으로는 웃고 있어도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다는 걸 알지만, 영화 속 사람들은 그의 외적인 웃음에만 관심을 둔다. 그를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고,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 : 그게 혐오와 극단의 시대가 개인을 바라보는, 약자의 무리를 바라보는 시선인 것 같다. 현상만으로 딱 결정지어 버리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안타깝다. 영화 내내 그가 닥친 상황이나, 그 상황에서 웃을 수밖에 없는 아서의 설정 말이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