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족하니 나의 채찍과 거울과 힘이 되어달라."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가 봄길 박용길(1919~2011) 장로에게 보낸 것이다. 민주화·통일 운동의 두 거목 늦봄과 봄길은 그렇게 서로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됐다.
24일 서울 수유동에 있는 문익환통일의집에서는 박용길 장로 탄생 100주년 특별전 '사랑의 기록가, 박용길' 개막식이 열렸다.
이날 문 목사와 박 장로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은 "두 분의 지극한 사랑, 그리고 가정을 사랑하고, 교회 공동체를 지극히 사랑하고,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민족 공동체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고난도 행복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며 "감히 저로서는 따라갈 수 없지만, 그래도 늘 마음 한켠에 담아둘 필요는 있지 않을까"라고 추억했다.
박용길 장로는 1944년 문익환 목사와 결혼했고, 해방과 전쟁 중에 호근·영금·의근·성근을 낳고 키웠다. 1976년 3·1구국선언문을 인쇄·배포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그는, 10년 이상 옥고를 치른 남편에게 매일 편지를 쓰며 옥바라지를 했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박 장로는 문 목사가 하늘로 돌아간 뒤에도 민주화·통일 운동에 헌신했다. 그 공로로 2005년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박 장로가 평생 모아 온 기록물을 전시하는 이번 특별전은 오는 12월 31일까지 이어진다. 박 장로가 옥에 있던 문 목사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1940년대에 주고받았던 연애편지, 육아일기, 기독교 여성 운동 활동, 면회록 등 민주화·통일 운동 시기 광범위한 기록물도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의 딸이기도 한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은 "나는 어머니가 11년에 걸쳐 옥중에 있는 남편과 주고 받은 편지를 까맣고 두꺼운 바이더에 봉투까지 함께 모두 모아놓은 것을 항상 봐 왔다"며 "처음에는 매일 쓰시지는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쓰시기로 결심하시고 날짜와 번호를 쓰고, 매일 쓰셨다. 혹시 여행으로 못 쓰시는 날에는 큰아들 호근이 대신 썼다. 그러니 어림잡아 3000통은 쓰셨나 보다"라고 전했다.
문 관장은 "어머니는 감옥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드리고 싶으셨나보다"라며 설명을 이어갔다.
"시를 적어 보내고 노래 악보를 그려 보내고, 아름다운 그림과 신문, 잡지, 초청장, 순서지, 주보, 가족과 친지에게서 온 편지들... 그래서 간수들까지도 어머니의 편지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에게 가족들과 친지들은 예쁜 것들을 보면 모아다 드렸다. 봉투, 편지지, 카드, 그림,말린 꽃잎, 나뭇잎, 스티커, 색색가지 펜들과 붓펜 등 모든 소재들은 박용길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편지가 되어 자칫 단조롭거나 우울해질 수 있는 감방생활에 활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었을 것이다."
박 장로의 기록은 한 여성의 사적인 기록을 넘어 역사의 기록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그의 편지는 100편을 선별해 편지집으로 펴낸다. 올 연말에는 박 장로 평전도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