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극장가에는 남성 주인공, 남성 서사 위주였던 이야기를 벗어나 그동안 이야기되지 않았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집중'한 여성 감독들이 여럿 등장했다. 스크린에서 사라진 듯했던 어린아이들의 모험기('보희와 녹양', '우리집')부터, 판타지적 요소를 지닌 여성 투톱 장르물('밤의 문이 열린다'), 개별적인 듯하지만 보편성을 가져가는 한 아이의 성장담('벌새'), 여성의 몸뿐 아니라 그 청춘이 지닌 우울과 결핍을 돌아보는 일상물('아워 바디'), '믿음'을 소재로 발칙한 상상력을 발휘해 낯설되 가볍지 않은 웃음을 주는 인권 영화('메기')까지. 여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 다섯 편과, 두 번째 장편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 맑고 싱그러운 로드 무비 '보희와 녹양'(5월 29일 개봉)
안주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은 소심하고 여린 소년 보희(안지호 분)가 대범하고 당찬 소녀 녹양(김주아 분)과 함께 아빠를 찾으러 나서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이야기다. 포스터에서부터 초록의 기운이 가득한 '보희와 녹양'의 강점은 청량함과 무해함이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때론 겁 없이 굴지만, 영화는 아이들에게 불필요하게 자극적인 위험을 안겨주지 않고 그저 그들의 방황 혹은 모험을 따라간다.
지난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으며, KTH상을 탔다. 주인공 보희 역의 배우 안지호는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을 탔다. 이밖에 올해 제7회 무주산골영화제, 제2회 제주혼듸독립영화제, 제14회 파리한국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 우울하고 서늘하지만, 온기도 있는 판타지 '밤의 문이 열린다'(8월 15일 개봉)
유은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밤의 문이 열린다'는 유령이 주인공인 장르물로, 판타지적 색채가 짙다. 유령처럼 살던 혜정(한해인 분)이 어느 날 진짜 유령이 되어 거꾸로 흐르는 유령의 시간 속에서 효연(전소리 분)을 만나게 되는 블루지 판타지 드라마다. 연유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하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좇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가져갈 수 있다.
지난해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초이스 장편 부문에서 관객상을 탔다. 같은 해 제5회 춘천영화제, 제9회 광주여성영화제,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에도 연이어 초청받았다.
◇ 슬프고도 명랑한 '우리집'(8월 22일 개봉)
장편 데뷔작 '우리들'로 제25회 부일영화상,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등 11관왕이라는 기록을 쓴 윤가은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우리집'. '우리집'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숙제 같은 '가족'의 문제를 풀기 위해 어른들 대신 직접 나선 동네 삼총사의 빛나는 용기와 찬란한 여정을 담은 작품이다.
'우리집'은 13일 기준 5만 2566명의 관객을 모아 전작 '우리들'의 5만 450명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올해 제63회 BFI 런던영화제에 초청됐고 제14회 파리한국영화제에서는 폐막작으로 선정됐다.
◇ 작은 새의 놀라운 날갯짓 '벌새'(8월 29일 개봉)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개별적으로 보이는 한 중학생 소녀의 삶을 그려냄으로써, 그 시대의 '보편'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벌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중산층 가정에서 온전히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은희(박지후 분)의 이야기다. 제목 '벌새'는 1초에 날갯짓을 80번 넘게 하는 작은 새에서 따 왔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소외된 은희가 한문 교실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김새벽 분)과 교감하고 깊은 위로를 받고, 닥쳐온 슬픔과 시련을 이겨내며 성장한다.
지난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받은 '벌새'는 개봉하기 전부터 전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25관왕을 기록해 이목을 끌었다. 개봉 후에는 제25회 아테네국제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제20회 베르겐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공동 대상을 받아 27관왕이 되었다. 50개 전후의 적은 스크린만이 배정됐지만, 13일 기준 12만 4358명의 관객을 모으며 선전 중이다.
◇ 낯설고 색다르게, 허 찌르는 코미디 '메기'(9월 26일 개봉)
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는 미스터리 펑키 코미디라는 장르를 표방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게 뭐지?' 할 수 있지만 보고 난 후라면 아마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다. '메기'는 병원을 발칵 뒤집은 19금 엑스레이 사진, 도심 한복판에 등장한 싱크홀과 위험을 감지하는 특별한 메기까지 믿음에 관한 가장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을 담은 작품이다.
13일 기준 3만 관객을 돌파한 '메기'는 지난해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먼저 알아본 작품이다. CGV아트하우스상, 시민평론가상, KBS독립영화상, 올해의 배우상 4관왕을 휩쓸었고,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제14회 오사카아시안영화제 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으며, 제23회 판타지아국제영화제 데뷔 작품 부문에서 특별 언급됐다.
◇ 여성의 몸과 삶의 고단함을 바라보는 '아워 바디'(9월 26일 개봉)
한가람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워 바디'는 8년간 행정고시에 번번이 떨어지며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청춘 자영(최희서 분)이 우연히 달리는 여자 현주(안지혜 분)를 만나며 달리기 시작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다. "멈추고 싶은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라는 메인 카피와 달리는 최희서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만 보면 '달리기 자극 영화'로 보이지만, '아워 바디'는 그보다 입체적인 영화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은 '아워 바디'는 제14회 오사카아시안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특별 언급됐다.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 제43회 홍콩국제영화제, 제7회 무주산골영화제, 제14회 파리한국영화제에 초청되거나 후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