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시간, 그리고 고통과 속죄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을 시도한 연극이 이 같은 물음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9일부터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보편적인 시간 법칙을 뒤집으며 전개된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주머니로 구성된 세 인물의 서사는 우리 모두가 익숙했던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흘러가지 않는다. 관객들은 해체된 시공간 속에서 한 남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조각과 파편된 장면을 마주한다.
극 중 남자와 여자는 고등학교 시절 연인이었다. 동급생 영훈을 살인한 죄로 교도소에 들어간 남자는 '우주 알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 여자가 일하는 출판사에 보내고 여자는 이 소설의 내용이 자신들의 이야기인 것을 알고 남자를 찾아 재회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자를 찾는 아주머니는 재회한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고 남자는 자신의 살인이 세상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아 간다.
작품은 과거로부터 쌓여 온 현재가 아니라 언제인지 알 수 없이 '계속되는 현재'를 무대에서 표현하기 위해 '신체행동연기'를 집약시켰다.
'신체행동연기'란 감정이나 심리의 표현보다 행동의 나열을 통해 인물과 장면을 전달하는 연기 방법론이다.
이 같은 '신체행동연기'의 연극 양식과 시간의 해체라는 원작 소설의 형식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라는 한쪽 방향으로 흐르고, 단 한번만 경험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개념을 뒤집어 관객들에 다양한 해석과 몰입을 제공한다.
시간을 헤집는 연출의 구성도 파격적이거니와 기울어진 원형 무대 속에서 주변을 빙빙 맴돌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배우들의 모습도 독특하다.
시간의 흐름과 정형화된 공간에 익숙한 관객들은 이 같은 연출이 다소 어렵고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쉽게 풀지 못한 퍼즐을 마주한다거나 하는 느낌으로 작품에 접근한다면 색다른 조립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해체된 시·공간 속 작품의 배열 역시 오롯이 관객들 몫으로 남긴다. 관객들은 동일한 행동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모습 속에서
강량원 연출가는 "소설을 읽었다면 책과 연극을 비교하는 재미를, 읽지 않았다면 공연을 통해 작품을 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면서, 극 중 대사인 '과거로부터 널 지켜줄게'를 인용해 "이 작품이 기억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덜어주는 공연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연극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오는 27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된다. 18~19일 공연은 '배리어 프리' 공연으로 진행되며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해설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