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협상이 결렬되면서 나온 북한의 반응을 보면 대화 재개의 가능성이 닫힌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국 공은 미국으로 넘어간 모양새다.
◇ 북한 "결렬은 미국 탓", 미국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가져갔다"
북한 측 수석대표인 외무성 김명길 순회대사는 5일 오후 6시 30분(현지시각)쯤 스톡홀름 외곽의 북한 대사관 앞에서, 대사관으로 들어간 지 10여분 만에 성명을 발표하고 "협상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렬됐다"고 밝혔다.
김 대사는 "미국은 유연한 접근과 새로운 방법, 창발적인 해결책을 시사하며 기대감을 부풀게 했지만, 아무것도 들고 나오지 않았으며 우리를 실망시키고 협상 의욕을 떨어뜨렸다"며 결렬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이어 "우리는 현실적인 방도를 제시했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취한 비핵화 조치와 신뢰 구축 조치들에 미국이 성의 있게 화답하면 다음 단계의 비핵화 조치들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미 국무부 모건 오테이거스 대변인도 북한 측의 발표 약 3시간 뒤 성명을 내고 "미국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져갔고, 북한의 대화 상대방들과 좋은 논의를 했다"며 "미국 대표단은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4개 핵심사안 각각에 대해 진전을 이루게 할 많은 새로운 계획에 대해 미리 소개했다"고 북한의 주장을 반박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하루도 지나지 않은 6일 오후 8시(한국시각)쯤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명의로 담화를 내고 "미국이 실제적인 적대정책 철회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이번과 같은 역스러운(역겨운) 협상을 할 의욕이 없다"며 또다시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은 기존 입장을 고집하며 막연한 주장을 되풀이했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으며 저들의 국내정치 일정에 조미(북미)대화를 도용해 보려는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려 했다"며 "판문점 수뇌상봉(정상회동)으로부터 99일이 지난 오늘까지 아무것도 고안해 내지 못한 그들이 2주일이라는 시간 내에 우리의 기대와 전세계적 관심에 부응하는 대안을 가져올 리 만무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낡은 각본을 또다시 만지작거린다면 조미 사이의 거래는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천명한 바 있다"며 "조미대화의 운명은 미국에 달려 있으며 시한부는 올해 말까지다"고 경고했다.
이는 지난 9월 9일 외무성 최선희 제1부상이 북미실무협상을 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내면서 경고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일단 2주라는 짧은 시간 내에 북한이 원하는 대안을 미국이 가져오기는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전문가들도 2주 내 실무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높게 보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이 밝힌 내용 중 "실제적인 적대정책 철회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이번과 같은 역스러운(역겨운) 협상을 할 의욕이 없다"는 내용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블러핑'이고, 실제로는 연말이 되기 전 협상이 이어질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같은 분석의 근거로는, 먼저 북한이 실무협상에 들어가면서 이미 결렬 관련 성명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첫 번째로 꼽힌다.
김명길 순회대사가 스톡홀름 외곽 북한 대사관에서 성명을 발표할 당시 협상장을 떠나고 약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발표했는데, 10여분만에 성명 내용을 준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내용을 미리 준비해 왔을 것이라는 얘기다.
통일연구원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이같은 구도로 작성된 문장이 미리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며 "의도적으로 메시지를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 결렬 수순에 두기 위해서 작성된 성명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 또한 김 대사의 성명 내용에 맞춰 조금 추가된 내용 정도가 있을 뿐, 의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다.
홍 실장은 "담화에는 미국의 국내정치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 이는 미국에게 빠져나가기 힘든 대응 논리를 미리 장치해 놨다는 개념이다"며 "오테이거스 대변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미국은 방안을 가져갔지만, 북한이 기선제압과 함께 원하는 내용을 높게 제시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아산정책연구원 신범철 안보통일센터장 또한 "8시간이면 토의를 많이 했다고 봐야 하는데 정작 김 대사의 성명엔 협상 관련 내용이 없다"며 "김 대사는 (미국의 제안이) 일정 수준에 차지 않으면 협상을 깨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본다. 북한은 더 밀어붙이면 미국이 양보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무협상 재개 직전 북한이 발사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에 대해 미국이 상당히 신중한 반응을 보인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 센터장은 "이같은 반응을 보고 북한은 미국이 대화가 급하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스웨덴이 제시한 2주라는 시한에도 자신들이 구속될 필요가 없다고 봤을 것이다"며 "현실적으로 2주 안에 미국이 새로운 것을 준비해 오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이 "미국의 적대정책 철회 조치 전에는 협상을 할 의욕이 없다"고 밝힌 내용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수사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이미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다"고 밝혔던 데다, 트럼프 대통령이 탄핵 위기와 재선 레이스 국면으로 들어가면서 협상을 하고 싶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분석의 한 이유로 작용한다.
실제로 미국이 SLBM에 대해 신중한 반응을 보인 데 이어, 스웨덴의 '2주 내 협상 재개'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으로 풀이된다.
홍민 북한연구실장은 "미국이 북한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기는 쉽지 않고, 결기를 보여주고 문턱을 높게 제시해서 상대의 협상 레버리지(leverage)를 약화시키겠다는 의도라고 봐야 한다"며 "미국이 제시한 내용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북한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도 있었을 수 있지만 일부러 전체 틀을 거부한 것이다. 일단 기선제압을 했다고 판단하면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협상에 돌입할 때 처음에는 기본적인 입장에 충실하게 되는데, 이를 끝마무리까지 계속해서 유지할 가능성은 낮다는 의미다. 실제로 미국 또한 이번 실무협상에서 벌어진 토론 자체는 좋았다고 평가했고, 한미 양국의 예상 시나리오에는 현재와 같은 결렬 상황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예측이 포함돼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북한이 공을 미국에 넘긴 상황에서, 탄핵 위기와 재선 레이스를 무사히 넘겨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가 실무협상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