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보면서 이렇게 한 여성의 변천사, 변화 과정이 면밀히 드러나는 작품은 드물고 용기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역할을 잘하면 저도 용기 있는 배우가 되겠다 싶었고,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최희서는 영화 '아워 바디'(감독 한가람) 언론 시사회 때 이 영화가 가진 '용기'를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아워 바디'는 8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하지만 자꾸만 떨어져 더 이상 무너질 곳도 없는 30대 여성 자영(최희서 분)을 주인공으로 해, 달리기 시작하며 차츰 달라지는 과정을 담아낸 영화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희서에게 이 영화의 '용기'에 관해 질문했다.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아워 바디'만이 가진 멋짐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워 바디'로 장편영화에 데뷔한 한가람 감독도, '아워 바디'로 첫 주연을 맡은 안지혜도 각자 느낀 이 영화의 매력을 들려줬다.
세 사람과 함께한 대화를 질문과 답 형태로 옮긴다.
▶ 한국사회를 사는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서 그런가 공감 가는 대사가 많았다. 각자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무엇인가.
최희서 : 저는 "조금만 더하면 날개를 달고 날아갈 텐데"라는 엄마(김정영 분)의 대사. 그걸 촬영했을 때 되게 슬펐다. 모녀가 서로를 아끼기는 하지만, 서로 생각하는 성공의 잣대가 다르고 잘 사는 삶에 대한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에. 엄마 입장에서는 고시 공부를 포기하는 게 (딸에게) 행복한 삶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지만, 여태까지 해온 딸의 공부와 노력이 아쉬운 거다. 자영이도 엄마 말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고시 공부를 시작할 건 아니지 않나. 삶의 기로에 섰을 때도, 엄마가 "잘했어"라는 말 한마디 못 해주는 그 심정. 그래서 되게 슬펐던 것 같다. 울음을 참으면서 연기했던 장면이다.
안지혜 : 저는 그… 자영 엄마의 말 중에 "나이 서른인데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라는 대사가 콕 와 닿았다. 저도 20대 중후반 때는 가족들이, 특히 언니가 되게 마음적으로 지원을 많이 해줬다. 도움도 많이 줬다. "열심히 해 봐라,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하면서. 그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한 20대 후반쯤에 언니가 "언제까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웃음) 그전에도 언니가 되게 걱정했겠지만 티를 안 내고 지원해줬다는 걸 그때 느꼈다. 나이가 차면서 앞이 안 보인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걱정돼서 언니가 티를 낸 거다. 숫자 '서른'이 코앞에 닿으니까, '나이 서른이 참 어른이구나. 뭘 보여줘야 하는 시기구나'라는 걸 많이 느꼈다. 그 대사가 많이 와닿았다.
한가람 감독 : 몇 개 있긴 한데 자영이 대사 중에는 "이것만 하면 세상에 못 할 게 없을 것 같다"는 것. 제가 운동 좋아하는 지인들과 같이 운동할 때, 저는 운동을 잘 못 해서 잘하는 분들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아니 이렇게 엄청나게 힘든 일을 하는데!' 회사 다니고 이런 건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거다. 물론 회사에 다닐 땐 그게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지만. 사는 건 여전히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서 꼽은 대사다.
▶ 자영은 8년 동안 고시 공부에만 매달리면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고, 현주는 자기 삶에서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워 바디' 속 인물들처럼, 본인 삶에서도 자신을 압도하는 벽을 느낀 적이 있나.
한가람 감독 : 이 영화 찍기 전에는 방송사 정규직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스물아홉 살에 마지막 시험 떨어졌을 때 '이건 안 되겠구나', '이 길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지혜 : 저는 운동을 하다가 연기 쪽으로 들어오면서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너무 낯설었고 적응이 안 됐다. 현장을 간다거나 사람을 만난다거나 이런 것들이 낯설고 너무 힘든 거다. '내 길이 아닌가 보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싶었고, (연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느껴서 안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니다! 해야 하는구나. 연기 다시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그런 새로운 환경이 좀 힘들었다.
최희서 : 저는 데뷔한 지 6~7년차 됐을 때 진짜 오디션에서 전부 떨어지고 소속사 미팅도 떨어졌다. '아무도 날 원하지 않는구나' 싶었던 시기가 진짜 힘들었던 것 같다. 그때 저의 극복 방법은 연극을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올리고 단편영화 찍는 거였다. 연기 활동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약간 돌파구였던 것 같다.
▶ 이렇게 다들 옆에서 보는데 말하기 좀 그럴 수도 있지만, 같이 작업해 본 소감을 듣고 싶다.
안지혜 : 저는 희서 언니 옆에서 이렇게 보면서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계속 느끼는 것 같다. (웃음) 진짜로 너무 그런 것 같다. 촬영할 때도 사실 희서 언니 옆에 계속 있고 싶어 했는데 희서 언니가 잘 챙겨주셨다. 매 순간 너무 열심히 하시는 것 같다, 뭐가 됐든지. 그런 에너지를 옆에서 받으면 너무 좋다, 나도 같이 이 공기 안에 있다는 게. (일동 폭소) 진짜다! 그래서 희서 언니 계속 보고 싶고 많은 걸 배우고 싶다. 그리고 감독님은,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낯을 많이 가리시는 것 같다. 지나면서 그런 걸 느꼈다. 또 되게 정확하고 명확한 사람인 것 같다. 뭔가 아닌 것 같으면 다른 걸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고, 더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된 건데 귀여우시다. (웃음) 단계별로 느끼는 것 같다. 여성스럽고 되게 강하면서도 여린 사람이라는 걸 느낀 것 같다.
한가람 감독 : 저는 희서 배우는 되게 뭐랄까 의지가 된 면이 있었던 거 같다. 경험이 많다는 것도 그렇지만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정적이고 꼼꼼했다, 놓치는 부분이 없이 다 얘기해서,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의지가 되는 동료 같은 느낌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은 그때는 저도 첫 촬영이라서 잘 챙겨주지 못했다. 내 코가 석 자라. (웃음) 편집하면서 생각했던 게 있다. (자영은) 몸을 만들어야 하는 거라서 식단(지키기)도 되게 어렵고 운동도 많이 해야 했다. 주인공이고 모든 씬에 다 나오는 데다가 되게 섬세한 감정 연기까지 해야 하는데, (그걸) 힘든 내색 없이 한다는 게 배우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멋있고 놀라웠던 거 같다. 지혜 배우 같은 경우는 '이 정도면 진짜 현주를 위해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했다. 준비된 상태였다. 몸이 주는 그 느낌도 되게 좋았다. 처음 오디션 봤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자마자 같이 하자고 했다. 모니터로 보면서도 되게 많이 놀랐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 언론 시사회 때 '아워 바디'를 용기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좀 더 자세하게 들려줄 수 있나.
최희서 : 예기치 못한 장면이 되게 많이 나온다. 스토리라인이 전형성에서 많이 벗어나고, 되게 새로운 시도인 장면이 많았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주제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데 비틀었고, 장편영화 데뷔작으로 만들어서 개봉까지 시키는 것 자체가 한국영화 산업에서 되게 좋은 시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기 있다고 느낀 건) 두 가지다. 전에 없던 소재를 연구하고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 두 번째는 여성이 주연인 영화를 찾아보기도 힘든데, 살인 사건도 없고 귀신도 안 나오고 강간도 안 당한다는 거다. 어떤 사회적 이슈를 조미료처럼 막 뿌리지 않으면서, 평범한 여성의 섬세한 성장 과정을 다룬 영화라는 것.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완전한 확신이 들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앞으로 이런 영화 못 만난다는 생각이 확실히 있었다.
한가람 감독 : 개봉을 앞두고 여러 얘기를 들었다. 내가 오히려 경험이 없고 학교(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다 보니까 진짜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걸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웃음) 달리기가 중요하긴 하지만 ('아워 바디'가) 달리기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달리기는 하나의 소재였다. 제가 방황했던 서른 즈음에 동 세대 작가가 쓴 소설, 영화로부터 되게 위로받았다. 주인공이 잘 사는 게 아니고 뚜렷한 해답이 있지도 않았는데 (그들도) 이런 감정을 겪고 있다는 것만으로 되게 위로가 됐다. 나도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힐링이 있지도 않고 나도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자영이를 통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걸 보여줘 감정을 대변하길 바랐다.
▶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아워 바디'를 추천해 달라.
안지혜 : 아, 제가 먼저 하겠다. (웃음) 주인공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뭔가 힘이 불끈 솟는 느낌을 받는 거 같은데 저희 '아워 바디'가 그런 영화인 것 같다. 영화 감상하는 동안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할 거다. 가을의 시작을 '아워 바디'와 함께하면 좋을 것 같다.
최희서 :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투성이인데 몸은 사실 뜻대로 이룰 수가 있는 거다. 달리기나 운동에 한 번도 도전해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이 영화 보면 공감할 것 같은데, 운동해 본 분은 더 공감할 수 있는, 정직한 몸에 관한, 앞으로도 보실 수 없는, 지금 놓치면 안 되는 영화다.
한가람 감독 : 극장에서 만나요~ (일동 웃음) 이 영화는 진짜 두 번 보는 게 훨씬 낫다고 하더라. 한 번 보면 사실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고 내가 기대하던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두 번 보면 낫다! (웃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