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은행강도 행각을 벌이는 형제와 이를 눈치챈 보안관의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은 은행강도 형제도, 백인 우월주의자 보안관도 아니다.
형제의 유일한 재산인 농장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푼돈을 빌려주고 농장을 압류해 이들을 극한으로 내몬 거대 금융자본, 즉 은행이라는 악당의 탐욕 앞에 피튀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형제나 보안관은 그저 '장기판의 졸(卒)'에 불과하다.
◇ 고객 속여 수수료 챙기기에 급급한 은행들
몇년전 본 이 영화가 머리 속에 맴돈 이유는 최근 대규모 원금손실이 발생한 해외 금리연계 DLF 사태와 영화속 은행의 탐욕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고위험 상품인 금리연계 DLF를 '원금손실 0%의 안전한 수익률'이라는 감언이설로 속여 가입시켰고 상당수 가입자들은 평생모은 재산을 날리거나 날릴 위기에 처했다.
그동안 은행들은 통계수치를 들먹이며 "우리도 이렇게 될줄 몰랐다"고 항변해왔지만 1일 발표된 금융감독원의 검사결과를 살펴보면 은행은 모른채했을 뿐이었다.
은행 내부에서조차 '원금손실 100% 가능성'이라는 우려가 나왔지만 이런 의견은 묵살됐고, 내규상 명시된 상품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나온 반대 의견을 찬성으로 조작하기까지 했다.
또, 기초자산인 해외금리가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며 원금손실 우려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입자의 손실비율이 더 커지는 방식으로 일부 조건을 변경해 상품을 계속 팔며 수수료를 챙겼다.
사태 초기부터 의혹이 불거졌던 계약서와 투자자 성향분석 등 필수서류 조작, 무자격자 판매 사실 등도 이번에 확인됐다.
◇ 탐욕 앞에 무너진 내부통제.소비자보호 시스템
처음 DLF 원금손실 우려가 제기된 지난 8월초 1억원이 넘는 사모펀드에 가입하면서 이를 꼼꼼히 살피지 않은 투자자들의 책임 역시 큰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 것이 사실이다.
이는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등 몇차례 위기를 거치면서 국내 은행들의 내부통제가 강화되고 감독 역시 정교해지는 등 통제시스템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또, 내 통장에 들어있는 예금의 한도 내에서만 돈을 쓸 수 있는 체크카드 한장 발급받는데도 수차례 동의서명을 해야하는데 1억원 짜리 사모펀드 가입을 위한 금융소비자 보호 절차는 보다 정교할 것이라는 신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이런저런 이유로 쌓여온 은행에 대한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수십년 동안 축적돼왔다는 내부통제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고, 금융소비자 보호 절차는 너무나 쉽게 생략되거나 조작됐다.
은행 검사에 관여한 한 금감원 관계자는 "내부통제나 소비자보호 같은 시스템 보다 앞서는 것이 '탐욕'"이라며 "탐욕 앞에 시스템이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더 큰 문제는 DLF 사태를 통해 드러난 탐욕으로 점철된 금융자본의 행태를 외부에서 강제로라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데 있다.
감독기관인 금감원이 있지만 규제완화 흐름 속에 사전적 예방 보다는 사후적 조치로 감독기능이 재편되고 있어 이번처럼 큰 사태가 터져야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다.
입법을 통한 통제도 가능하지만 정쟁으로 일관된 국회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9년 넘게 표류중인 금융소비자보호법이 20대 국회에서도 자동폐기될 위기해 처한 상황이 대표적이다.
◇ 은행 "책임 통감" 이번엔 믿을 수 있을까?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 토비는 농장이 은행으로 넘어가기 직전 은행을 털어 마련한 돈으로 빚을 청산함으로서 자신을 극한으로 내몬 거대 금융자본을 향한 '소소한'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뿐 현실에서 은행의 불법행위로 피해를 본 DLF 가입자들은 복수는 커녕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금감원의 분쟁조정과 손해배상 소송이라는 피해구제 수단이 진행중에 있지만 거대 로펌을 앞세운 은행과 일개 개인의 싸움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다만, 불법행위가 속속 드러나며 여론이 악화되자 해당 은행들이 나서 분쟁조적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피해구제 가능성은 남아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에도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 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