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처럼, 조커의 삶은 멀리서 봤을 땐 다른 사람을 웃기고 즐겁게 하는 '어릿광대'다. 영화 '조커' 속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삶은 우울과 극단적 감정 사이에서 종잡을 수 없는 폭풍에 휩싸여 있다.
거기서 다시 한 층 더 들어가면 '해피'(happy)라는 가짜 이름으로 포장한 채 숨겨 온 분노와 절망과 슬픔이 담겨 있다. 어릿광대의 거짓 웃음 속 자신을 구깃구깃하게 가려온 비극과 광기의 장면이 관객에게 가져오는 아이러니는 말 그대로 폭풍과도 같다. 그렇기에 아서 플렉의 발작적인 웃음을 보며 정반대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DC 시리즈 사상 가장 어둡고도 두려운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조커'는 격정적이다. 그리고 토드 필립스 감독은 만화 속 조커를 '현실'로 끌어냈다. 감독은 현실로 끌어낸 어둡고 광기 넘치는 고담시의 조커를 '인간'적이면서도, 그려내는 이야기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도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잭 니콜슨의 조커('배트맨', 1989)나 히스 레저의 조커('다크 나이트', 2008)와는 다르다. 영화는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형의 악당이자, 차가운 광기를 간직한 조커가 왜 악당이 되었는지를 최초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은 굉장히 인간적이고, 또 설득력 있게 표현된다. 그렇기에 아서/조커의 사람과 사회를 향한 분노와 광기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극 중 아서는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였다"고 말한다. 아서의 말마따나 '조커'를 구성하는 색은 희극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라 알려진 빨강, 주황, 노랑이다. 희극의 색을 통해 비극의 배경을 그려낸다. 마치 영화 속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희극의 상징인 어릿광대와 웃음을 통해 비극의 감정을 표현하듯이 말이다. 조커는 아픔과 슬픔과 분노의 상황에서도 웃는다. 물론 그 웃음마저도 처절할 정도로 비극적이다.
아서의 변화와 함께 영화는 다소 위험한 생각과 질문을 던진다. 화이트칼라가 '아서'를 대하는 방식, '머레이 쇼'가 아픈 '아서'를 활용해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과 그런 웃음을 소비하는 현실을 보자면 과연 혐오와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물론 조커 이전에 아서를 볼 때로 한정할 수 있는 질문이다. 아서에 대한 폭력과 조커가 행하는 폭력을 보자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속성에 관해서도 물음을 던지게 된다.
물론 조커와 어릿광대 가면을 쓴 시민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범죄자가 시대와 사회를 향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 외친 상황을 떠올리게끔 한다. 권력자의 부정부패와 소외계층에 대한 외면과 박탈감이 아이러니하게도 범죄자의 발언과 죽음을 통해 돌아보며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듯이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이 불온한 고담시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았고, 각자 어떤 질문을 던졌으며, 어떤 해답을 찾았는지, 아서/조커를 통해서 돌아보게 되고 질문하게 된다.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혼돈 속에서도 명확한 지점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다. 간간이 클로즈업 되는 호아킨 피닉스의 얼굴, 그리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그의 근육과 골격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아서 플렉의 내면과도 같다. 그만큼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격정적이다. 그것만으로도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10월 2일 개봉, 123분 상영, 15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