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에 맞설 북간도 정신 깨우는 '분노의 추모'

[북간도 연대기 ⑧] '북간도의 십자가' 음악감독 류형선 작곡가
내내 이어지는 음악 메시지로 '물신주의' 너머 더 나은 미래 염원
"나의 노래로 삶이 치유되는 경험, 작곡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
"기독교적 가치 뿌리내리기…3·1운동에 참여한단 간절한 심정"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잔잔하게 이어지는 구슬픈 피아노 선율 위로 날카롭고도 애잔한 해금 소리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곧이어 일렁이는 파도처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던 그 소리를 찢고, 호령하듯 뚜렷한 피리 음색이 휘몰아친다.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을 지낸 유명 작곡가 류형선 곡 '분노의 추모'는 눈물을 거두고 서서히 고개를 드는, 두 주먹 불끈 쥔 투사의 모습이다.

이 곡은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에 쓰였다.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초석이 됐던 '만주 15만 원 탈취사건'(1920년 1월 14일 독립운동단체 '철혈광복단'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일제의 대륙 침략 금융창구인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로 향하던 거금을 탈취한 사건)으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고, 이후 승리의 역사를 쓴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소개로 이어지는 길목에서다.

'분노의 추모'를 두고 그는 "다섯 손가락이 모두 소중하지만, 굳이 각별하게 떠오르는 곡"이라고 했다. "내 속에 담긴 무언가가 음악이라는 옷을 입을 때, 실체로 떠오르도록 만드는 곡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분노의 추모'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분노하거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픈 사람이 그것을 억누르다 보면 턱을 바들바들 떨잖아요. 영화 속 그 장면을 이러한 정서로 읽었습니다. 해금 소리를 넣은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끓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기 위해 바들바들 떠는 이미지를 해금으로 나타내고자 했죠."

그는 "이러한 야만이 지배하던 시대가 20세기였는데, 우리는 그 야만이 '맘모니즘'(mammonism), 그러니까 물신숭배주의로 옷을 갈아입고 훨씬 더 교활하고 정교하게 지배하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며 "'류형선, 너는 무엇을 위해 살 거냐' '당신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을 곡 '분노의 추모' 말미에 피리소리로 절규하듯이, 호통치듯이, 혹은 선동하듯이 표현했다"고 부연했다.

'북간도의 십자가' 음악감독을 맡은 그는 올해 '3·1운동 100주년 범국민대회'에서도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류형선 감독은 "실제 3·1운동에 동참한다는 심정으로 범국민대회 음악감독과 지휘는 물론 기념 노래를 만들고 뮤직비디오에도 참여했다"며 "'북간도의 십자가'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함께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에 각별했어요. '북간도의 십자가'에서 이만열 교수는 3·1운동 당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이 22%라고 했습니다. 당시 전체 인구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이 1.5%였다고 해요. 여기서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죠. 한국 기독교 가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 "나는 문익환 목사 덕후"…'옥중 성가집'과 운명적 만남


작곡가 류형선(사진=CBS 제공)
류 감독은 앞서 박근혜 정권이 만들었던,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 민주화운동 거목으로 손꼽히는 고 문익환(1918~1994) 목사 헌정 앨범을 만들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문익환 목사 덕후"라고 했다.

"문익환 목사에 대한 존경심과는 별개로 팬심 같은 것이 있어요. 20대 때부터 정말 닮고 싶은 매력적인 사람이었죠. 제가 1999년 결혼하고 문익환 목사 부인 박용길(1919~2011) 장로께 인사차 갔는데, 그때 방에 진열된 문 목사 유품들 중 20쪽도 안 되는 '늦봄 문익환 옥중 성가집'이라는 얇은 책을 봤습니다. 펼쳐보니 악보는 하나도 없고, 기존 찬송가 가락에 맞춰 쓴 노랫말만 20곡 정도 있었죠."

그는 "그 책을 들고 보는데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 목사가 그 성가집을 쓴 때는 1982년으로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며 "아마도 그때 장성한 류형선 같은 작곡가가 있었다면 '여기에 곡을 붙여 달라'고 하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제가 곡을 쓰고 정태춘, 홍순관, 송정미 등과 함께 음반을 제작했다"고 회고했다.

이 헌정 앨범에 수록된 '고마운 사랑아'(작시 문익환, 작곡·편곡 류형선, 노래 정태춘), '이 작은 가슴'(작시 문익환, 작곡·편곡 류형선, 노래 송정미) 등은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에도 삽입돼 몰입을 배가시키는 장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노래 '이 작은 가슴'은 국악에서 '계면조'라는 슬프고 애타는 가락이에요. 옥중에서 쓴 문익환 목사의 그 가사가 지독히도 슬프게 느껴졌거든요. '이 느낌대로 곡을 썼다가는 신파적인 노래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걱정으로 (감정을) 많이 덜어내려 애썼던 곡이죠. 반주로 기타 한 대만 쓴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보다 우아하고 관조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온화한 성품이 느껴지는 목소리의 가수가 불렀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적임자로 떠오른 송정미 씨에게 부탁했죠."

극중 북간도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태춘이 부른 '고마운 사랑아'을 두고는 "지금도 이 곡을 즐겨 듣는다. 자기가 만든 곡을 자신이 즐겨 듣는다는 것이 사실 쑥스럽고 우습잖나"라며 "내가 만든 노래 같지 않다. 정태춘 씨가 워낙 잘 불러서 그가 만든 것 같다"고 했다.

"작곡가는 늘 일관되게 살아갈 수 없어요. 어느 시기에 정점이 있고, 그 능선을 넘으면 또 다른 정점을 향해 가는 식이죠. '고마운 사랑아'는 제가 30대에 작곡가로서 정점 하나에 가 닿았던 곡입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가 쓴 그 가사는 꼭 나를 향해 던지는 위안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내 노래가 아닌 것처럼) 낯섭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고마운 사랑아'에 각별한 의미를 두는 이유가 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그 곡을 쓰고 난 뒤에 오랫동안 미뤄 왔던, 일찌감치 용서했어야 마땅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용서했습니다. 또한 용서를 구했어야 마땅한 누군가에게도 전화해 용서를 구했어요. 그 노래 덕에 내 안에 참 아름다운 변화가 찾아왔죠. 작곡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렇듯 내 삶이 아름답게 치유되는 경험으로 곡을 쓸 때예요."

◇ "북간도 정신은 '오래된 미래'…예언자적 사명 되찾아야"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류 감독은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음악 다큐멘터리로 만들고자 애썼단다. 90분 가까운 상영시간 내내 음악이 끊이지 않도록 배치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당대 북간도 기독교인들은 나에게 영웅들"이라고 했다.

"윤동주(1917~1945), 문익환, 문동환(1921~2019), 김재준(1901~1987), 안병무(1922~1996)…. 그러고보니 제가 이 다섯 분에 대한 노래를 어떠한 경로에서든 다 만들었네요. (웃음) 사실 지금 한국 교회 현실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상실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 뿌리를 깊이 파헤쳐 가다 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물신숭배주의예요."

그는 "우리 신앙의 가치가 물신주의와 투쟁하면서 패배해 가고 있다는 강력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참여 제안을 받았죠. 이를 통해 '한국 교회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땅에서 불쑥 솟아오르리라고 기대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한국 교회 테두리 안에는 북간도에서 십자가를 거머쥐었던 사람들의 거점이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

류 감독은 "여전히 맑은 물이 샘솟는 그곳에 우리가 뿌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물신주의의 포로가 되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 교회가 가야할 미래, 말 그대로 '오래된 미래'와 같은 비전이 북간도에서 십자가를 쥔 채 애국 독립운동과 크리스천으로서 일상을 영위했던 그들의 삶에 있지 않을까"라고 역설했다.

"이 점에서 굉장히 행복한, 감동적인 체험으로서 '북간도의 십자가' 음악 작업을 했습니다. 이 영화는 음악 넘버만 해도 50개나 되니 굉장히 각별해요. 앞으로 다가올 100년을 위한 3·1운동에 참여하는 기분이었죠."

그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한국 교회가 뿌리 삼아야 할 거점이 북간도에서 이미 용광로처럼 들끓어올랐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시대를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미래의 좌표를 찍어주는 예레미야, 아모스, 나단과 같은 예언자요 선지자"라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는 이 시대에 절박하게 필요한 그런 분들을 모두 잃어버렸잖아요. 이러한 현실에서 영상 콘텐츠인 '북간도의 십자가'가 예레미야, 아모스, 나단과 같은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굉장히 외롭고 고단하고 힘든 법이에요. CBS가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일을 지속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을 마련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저 역시 혼신의 힘을 다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나라 잃은 그들에게 '북간도'는 약속의 땅이었다
② 1백년 전 만주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한국인
③ 인삼밭 들어서 잊힌 '청산리대첩' 최대 격전지
④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⑤ 북간도 넘어간 카메라…조선족 너머 겨레를 담다
⑥ 딸 그만 낳으라고 '고만녜'가 북간도서 되찾은 꿈
⑦ 만주 15만원 탈취사건…'무장투쟁' 신호탄을 쏘다
⑧ 야만에 맞설 북간도 정신 깨우는 '분노의 추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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