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은 24일(뉴욕 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유엔과 모든 회원국들에게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9월 취임 첫 해 유엔총회 연설이 북미 정상간 '말폭탄' 등 상호위협을 진정시키기 위한 한반도 평화 구상 제시였다면, 이날 세 번째 연설은 조만간 재개될 북미간 비핵화 실무협상에서 실질적 성과를 도출하기 위한 문 대통령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겼다.
◇ 제재 완화에서 '체제안전 보장'으로 방점 이동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 참석이 확정된 이후부터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숙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두 번째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의 비핵화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일부 대북제재 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이 2017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이미 유엔 안보리 제재 명단에 오른 만큼, 실질적 비핵화 조치가 선행되지 않는 조건에서 일부 제재 완화 카드는 실현되지 못했다.
문 대통령이 세 번째 유엔총회 연설에서 "비무장지대를 국제평화지대로 만들자"고 제안한 배경에는 북한이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 가장 원하는 반대 급부 중 하나인 '체제안전 보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증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부 제재완화도 필요하지만 제재완화로 가기 위한 북한의 일정정도 비핵화 조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가 선행되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날 150개국 정상급 인사들 앞에서 "비무장지대는 70년 군사적 대결이 낳은 비극적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 기간 동안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 생태계 보고로 변모했고, JSA, GP, 철책선 등 분단의 비극과 평화의 염원이 함께 깃들어 있는 상징적인 역사 공간이 됐다"고 강조했다.
또 "비무장지대는 세계가 그 가치를 공유해야 할 인류의 공동유산"이라며 "나는 남북 간에 평화가 구축되면, 북한과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 지렛대로 활용될 북한에 대한 '제체안전 보장' 구상을 구체적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판문점과 개성을 잇는 지역을 평화협력지구로 지정해 남과 북, 국제사회가 함께 한반도 번영을 설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내고, 비무장지대 안에 남·북에 주재 중인 유엔기구와 평화, 생태, 문화와 관련한 기구 등이 자리 잡아 평화연구, 평화유지(PKO), 군비통제, 신뢰구축 활동의 중심지가 된다면 명실공히 국제적인 평화지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국제기구가 '평화의 상징'이 될 비무장지대에서 세계평화와 관련된 활동을 한다면 재래식 무기에 큰 위협을 느끼는 북한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큰 체제보장 '안전판'이 없다는 판단이다.
기존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등이 서면 약속이라면, 비무장지대 내 국제기구 활동은 약속을 구체화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안전보장을 담보할 수 있다는 고민도 담겼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9·19 평양 남북 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등에서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한 만큼, 실질적 비핵화를 담보할 '대가'를 구두 약속이나 서면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자는 제안인 셈이다.
◇ 뉴욕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DMZ 구상 전달
실제로 문 대통령은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취임 후 9번째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비무장지대 국제기구 설치 필요성을 강하게 역설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도 국제기구 설치가 북한의 체제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엔의 역할을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이 한반도 상황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동력이 됐다"며 "지금 한반도는 총성 몇 발에 정세가 요동치던 과거와 분명하게 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이라는 여정이 아직 남았지만, 과거와 달라진 현재의 성과를 짚으며,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합의와 법으로 뒷받침되는 평화가 진짜 평화이며, 신뢰를 바탕으로 이룬 평화라야 항구적일 수 있다"며 "끊임없는 정전협정 위반이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때로는 전쟁의 위협을 고조시켰지만 지난해 9·19 군사합의 이후에는 단 한 건의 위반행위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또 "김정은 위원장의 손을 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은 그 행동 자체로 새로운 평화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선언했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걸음이었다"며 "나는 두 정상이 거기서 한 걸음 더 큰 걸음을 옮겨주기를 바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비무장지대 내 국제기구 설치와 활동이 현실화되면 북한도 체제 위협에서 자유로워지는 만큼, 국제사회가 합의와 법으로 이를 담보하고, 실질적 비핵화를 위한 행동 개시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제안인 셈이다.
이날 문 대통령보다 약 3시간 앞서 유엔총회 연설을 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성장 잠재력을 언급하면서 비핵화 실무협상에 북한이 진지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핵포기와 동시에 북한이 국제사회 질서로 편입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재차 확인하면서 북한의 유연한 접근을 촉구한 것으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만간 재개될 북미 실무협상을 의식한 듯 지난 18일 언급한 '새로운 방법론'에 대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공개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