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탈취사건을 일으킨 이들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단체 '철혈광복단' 소속 독립운동가 윤준희(1892~1921), 임국정(1894~1921), 한상호(1899~1921), 최봉설(1897~1973) 등이었다. 그들은 당대 북간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한인 기독교 공동체인 명동촌 등지에서 교육받은 인재였다.
이 15만 원은 독립전쟁을 치를 군자금으로 쓸 계획이었다. 그 시절 총 한 자루 값이 20~30원이었다니, 15만 원이면 적게는 5000명, 많게는 7500명이 무장할 수 있는 금액인 셈이다.
철혈광복단은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러시아로 향했지만, 당대 악명 높은 밀정 엄인섭(1875~1936)의 배신으로 결국 일제에 체포된다. 이때 붙잡힌 4명 가운데 최봉설을 제외한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한날 한시에 순국한다.
이들 세 사람 유해는 서울 북쪽 산기슭에 아무렇게나 매장됐다가, 해방 뒤인 1966년에서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당시 추모예배를 집전했던, 과거 북간도 명동촌 지도자 출신 문재린(1896~1985, 문익환·동환 목사 부친) 목사는 생전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한상호라고 하는 사람은 명동학교 졸업생이고, 최봉설이라는 사람은 내 동서 되는 사람이다. 그 다음에 윤준희라고 하는 사람하고, 임국정이라고 하는 사람 등 다섯 사람이 명동 앞에서 일이 나면 (일제 눈에 띄기 때문에) 안 되겠으니까, 거기서 한 15리 정도 내려와서 개천 옆에 숨어 있다가 (15만 원 탈취사건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향후 북간도에서 항일 독립 무장투쟁이 본격화하는 데 촉매로 작용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렇게 한반도와 맞닿은, 민족 독립 전쟁터였던 북간도에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승리의 역사로 이어지는 독립전쟁 서막이 오른다.
◇ 독립운동 숨통 조인 일제 무단통치 아래 번진 '혁명적' 만세운동
이러한 맥락에서 북간도 내 명동촌 역시 학교를 세우고 후손을 가르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키웠다. 그렇게 독립운동 세력은 북간도를 중심으로 향후 펼쳐질 치열한 무장 독립투쟁을 차근차근 준비해 간 셈이다.
같은 시기 한반도 정세는 북간도와 180도 달랐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해 독립운동가 105명을 체포한 '105인 사건'을 일으키는 등 무단통치로 국내 독립운동 세력의 숨통을 조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해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가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1919년 3·1운동은 말 그대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덕주 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는 "일본으로서는 이제 드디어 한반도는 완전히 자기 땅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3·1운동이) 터져나온 것이다. (일제의) 충격이 굉장히 컸을 것"이라며 "가물었을 때는 시냇물이 지하로 흐르듯이, 포기할 수 없는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잠복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초창기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시키는 구심점 가운데 하나였다. 이는 3·1운동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기독교 대표다. 서울 외 지방에 가면 대부분 기독교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3·1운동 당시인 1919년) 3월에서 5월까지 통계를 보면, 잡혀 들어온 사람을 조사하는데 22%가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전체 기독교인 수가 20만 명 조금 넘었다. 당대 우리나라 인구가 1600만 명을 오갔다. 1600만 명의 20만 명이라고 한다면 1.5% 내외다. 기독교인 수가 1.5% 내외인데,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도는 17~22%이니 기독교인의 참여도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 "스스로 쟁취하겠다"…북간도 독립운동 '무장투쟁' 진화
1919년 3월 13일 중국 지린(吉林)성 용정시에 있는 서전대야 터에서 독립선언포고문이 뿌려졌다.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어떤 이는 손에 태극기를, 어떤 이는 손에 십자가를 쥐고 독립을 외쳤다. 이른바 '3·13만세운동'이다.
서굉일 한신대 명예교수는 "(1919년 3월 13일 용정 서전대야에서는) 명동학교와 정동학교의 군악대가 북 치고 소고 치면서 학생들을 맨 앞에 이끌고 운집했다"며 "각 지역 종교 지도자들이 시교당이나 교당, 교회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그 운동에 참가했다. 일제는 기록에 1만 명이 모였다고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써놓은 기록에는 3만 명 내외가 모였다"고 전했다.
나라 밖에서 벌어진 가장 큰 규모의 저항운동인 3·13만세운동으로 만주에서는 평화로운 시위가 이어졌지만, 일제는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가뒀다. 이를 계기로 북간도 항일 독립운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적극적이고 투쟁적으로 진화해 간다. 일제에 대항하려면 마찬가지로 투쟁력을 길러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의지였다.
이미 북간도 한인 사회에서는 종교와 사상을 떠나서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 군대와 맞서 싸울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3·13만세운동은 그 때를 알리는 기폭제였다.
1910년대가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는 시기였다면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 수많은 국내 진공이 이뤄졌다. 지린성 왕청시에 있는 라자구(羅子溝) 군관학교, 십리평(十里坪)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등에서 키워낸 독립군은 그 선봉이었다.
지린성 왕청시 라자구 태평촌을 찾은 역사학자 심용환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곳 첩천산중 가파른 절벽에 새겨진 태극기와 여러 이름들을 봤기 때문이다.
청산리대첩 이후 보복 만행을 벌인 일제는 북간도 한인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학살마저 자행했다. 명동촌 등 한인 사회가 속한 용정은 일본 지배를 받는 만주국이 됐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북간도를 떠나 중국 내륙과 러시아로, 일부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무장투쟁을 지속했다. 이들 독립운동 세력은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30년대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협력해 독립전쟁을 계승했다.
이덕주 전 교수는 "'그 종이(독립선언문) 하나 냈다고 해서 독립시켜줄 것 같냐?' '시기상조다' '어리석다'라는 비판에 내로라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렇게 대답했다더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이른 줄은 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30배, 60배, 100배 결실을 맺는다' '자기가 살려고 하면 그냥 하나로 끝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기 도장 찍고 감옥에 들어갈 터인데, 독립을 거두러 들어가는 게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가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우리가 3·1운동을 거룩한 운동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심는 것이 필요한 때다. 다른 사람들은 다 거두려고, 기쁨만 누리려고 한다. 심는 자의 눈물은 모른다. 누군가의 심는 아픔과 외로움이 있으면 훗날 그것을 거두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① 나라 잃은 그들에게 '북간도'는 약속의 땅이었다 ② 1백년 전 만주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한국인 ③ 인삼밭 들어서 잊힌 '청산리대첩' 최대 격전지 ④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⑤ 북간도 넘어간 카메라…조선족 너머 겨레를 담다 ⑥ 딸 그만 낳으라고 '고만녜'가 북간도서 되찾은 꿈 ⑦ 만주 15만원 탈취사건…'무장투쟁' 신호탄을 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