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정현, 권순우는 왜 나오지 못할까

'아! 높구나' 최지희가 16일 WTA 투어 KEB하나은행 코리아오픈 단식 1회전에서 고전하자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사진=코리아오픈)
올해도 여자프로테니스(WTA) 투어 단식에서 한국 선수들이 힘을 쓰지 못했다. 6명이 예선에서 탈락했고 와일드카드로 나선 본선에서도 1승이 힘들었다.

WTA 랭킹 159위인 한나래(인천시청)는 17일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코트에서 열린 KEB하나은행 코리아오픈(총상금 25만 달러) 단식 1회전에서 아나스타시야 포타포바(75위·러시아)에 0-2(6-7<4-7> 1-6)으로 졌다. 예선 없이 본선에 올랐지만 1회전을 넘지 못했다.

1세트가 아쉬웠다. 한나래는 타이브레이크 접전을 펼쳤지만 고비를 넘지 못했다. 맥이 풀린 한나래는 2세트를 무기력하게 내줬다.

전날 역시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802위 최지희(NH농협은행)도 크리스티나 플리스코바(81위·체코)에 0 대 2(1-6 4-6) 완패를 안았다. 최지희는 최근 국제테니스연맹(ITF) 서킷 대회 영월투어 2차 대회 정상에 올랐지만 역부족이었다.

앞서 예선에서도 한국 선수들은 쓴맛을 봤다. 장수정(268위·사랑모아병원)이 예선 첫 경기에서 울리케 아이케리(244위·노르웨이)에 완패를 당하는 등 6명 모두 본선행이 좌절됐다. 17살 기대주 박소현(주니어 19위·CJ제일제당 후원)만이 유 샤오디(246위·중국)을 1회전에서 꺾었지만 본선은 밟지 못했다.

지난해도 한국 선수는 이 대회에서 본선 1승이 무산됐다. 다만 한나래가 2004년 1회 대회 이후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예선을 통과해 자력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그만큼 WTA 투어의 벽이 높았다.

'혼신의 스트로크' 한나래가 17일 코리아오픈 단식 1회전에서 백핸드 스트로크를 구사하고 있다.(사진=코리아오픈)
프로 무대에서 선전 중인 한국 남자 선수들과 대조를 이룬다. 일단 정현(143위·제네시스 후원)이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 대회 4강(호주오픈)을 이루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올해는 권순우(81위·CJ 후원)가 세계 67위를 꺾는 등 선전하고 있다. 이덕희(216위·서울시청)도 청각 장애 선수 최초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본선 승리를 거뒀다.


이에 비해 여자 선수들은 긴 침묵에 빠져 있다. WTA 투어에서 2013년 장수정이 고교생으로 코리아오픈 8강에 오른 이후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지난해 한나래-최지희가 코리아오픈 복식에서 2004년 조윤정-전미라 이후 14년 만에 우승했지만 아무래도 단식보다 주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당초 대한테니스협회는 전임 주원홍 회장이 사재 5억 원을 출연하고 삼성의 지원을 이끄는 등 유망주 발굴에 힘썼다. 삼성증권 감독을 역임한 주 전 회장은 1992년 삼성물산 테니스단 창단을 견인하며 이형택, 조윤정, 전미라, 윤용일 등을 키워냈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정현, 권순우 등이었다.

여자부에서도 장수정, 한나래, 최지희 등 20대 초중반 선수들이 육성됐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장수정은 여고생 시절 코리아오픈 8강에 오르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후 세계 수준과 적잖은 괴리를 보이며 투어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러 요인들을 지적한다. 테니스 해설위원인 박용국 NH농협은행 스포츠단 단장은 "일단 체격적인 부분, 힘에서 차이가 나는 게 가장 크다"면서도 "그러나 공격적이고 빠른 템포의 세계 테니스의 흐름이 뒤처진 것도 사실"이라고 짚었다.

체격 조건에서 밀리는 만큼 전술, 기술에서 만회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인 부모를 둔 재미교포 크리스티 안(93위)이 올해 메이저 대회인 US오픈 16강에 오른 점을 보면 충분히 만회할 여지는 있는 셈이다.

한국인 부모를 둔 재미교포 크리스티 안은 올해 US오픈 16강에 오르는 등 코리아오픈에서도 돌풍이 기대된다.(사진=코리아오픈)
박 단장은 "우리와 비슷한 체격 조건인 중국은 리나 이후 대대적인 지원으로 국제대회에 선수들을 출전시켜 왕창(12위) 등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도 한 템포 빠른 스트로크인 라이징볼 기술을 앞세워 세계 무대를 두드리고 있는데 우리도 수비적인 그라운드 스트로크에만 치중하지 말고 발리 등 공격적인 기술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수들의 정신력 등 자세의 문제도 있다는 지적이다. 한 테니스 관계자는 "세계 무대에 도전하기보다는 전국체전 등 국내 대회 성적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면서 "저변이 얇다 보니 진학이나 취업은 되고 넉넉히 보수도 받으니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일부 지도자들도 선진 기술 전수보다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덧붙였다.

일단 어린 선수들에 대한 기대감은 있다. 서양 선수 못지 않는 당당한 체구의 이은혜(19·NH농협은행)는 파워 테니스로 데뷔 시즌 실업 무대를 평정하고 있다. 지난 6월 ITF 김천 여자투어 대회 정상에 오른 이은혜는 국제대회 경험만 더 쌓으면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평가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주니어 최강 박소현과 구연우(16·CJ제일제당 후원)도 성장하고 있다. 구연우는 이달 초 ITF 영월 투어에서 프로 첫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현 곽용운 회장 체제의 협회도 중국 부동산 그룹이 운영하는 테니스 아카데미의 지원을 받아 현지 대회에 유망주들을 보내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아직 어린 선수들이라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지는 한국 여자 테니스. 과연 여자 정현, 여자 권순우가 탄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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