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넘어간 카메라…조선족 너머 겨레를 담다

[북간도 연대기 ⑤]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연출 CBS 반태경 PD
보름여 간 현지 취재 우여곡절…"촬영분 모두 지우고 軍서 풀려나기도"
"지금 누리는 기쁨 위해 1백년전 씨앗 뿌렸던 이들…북간도 독립운동史"
"굴곡진 역사 함께했던 동포들 '조선족' 편견…이해 노력 부족했단 고민"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제작진이 중국 지린(吉林)성 옌벤(延邊)조선족자치주 현지 풍광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CBS 제공)
"용정 은진중학교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북간도 한인 유적지예요. 말 그대로 폐허로 남은 건물이었죠. 본 촬영에 앞서 답사를 가서 봤을 땐 정말 왈칵하더군요."

CBS 반태경 프로듀서(PD)는 지난해 6월 만주 북간도 일대, 그러니까 지금의 중국 지린(吉林)성 옌벤(延邊)조선족자치주로 넘어가 현지 취재를 벌였다.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연출을 위해서였다. 최근 서울 목동 CBS사옥에서 만난 그는 이를 두고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고 회고했다.

"본 촬영을 위해 제작진이 은진중학교로 다시 가 건물 내외부에서 한참 찍고 있는데, 지나가던 현지 군부대 관계자들이 보더니 '이리 오라' '뭐 하는 거냐'고 묻더라고요. '유적지 촬영을 왔다'고 했더니 '허가도 안 받고 찍었다'며 그들에게 여권을 빼앗겼죠. 결국 촬영분을 모두 지우고 나서야 풀려난 일도 있었어요."

반태경 PD는 "폐허로 남은 은진중학교 건물의 깨진 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광경을 보면서 뭉클했다"며 "그 촬영분을 빼앗겨 작품에 못 쓰게 된 일이 두고두고 아쉽다"고 말했다.

그가 북간도에 주목한 까닭은 올해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데 있다. 3·1운동을 살피던 중 당대 북간도에서도 대규모 만세운동이 번졌다는 정보를 접했다. 그 참가자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은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끈질기게 이어갔다는 사실과 함께였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하면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헌법 전문을 새삼 되새겼어요. (웃음)"

반 PD는 "영화에도 등장하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시편 126장 5절처럼, 지금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100여 년 전 씨앗을 뿌렸던 이들의 정신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닐까"라며 "그 시절 멀리 북간도에서 달걀로 바위 깨는 심경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던 이들을 기억하고 이해하는 데 '북간도의 십자가'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 "북간도 특징, 돌·풀·옥수수밭 외엔 아무것도 없다"

'북간도의 십자가'를 연출한 CBS 반태경 PD(사진=CBS 제공)
북간도 현지 취재 당시 제작진은 기독교 독립운동이 남긴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다. 태극기와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를 함께 새긴 기와를 얹은 명동촌 고택, 기독교인들이 큰 몫을 담당했던 청산리대첩과 같은 무장투쟁 현장 등이 그러했다.

특히 북중 접경지대에서 최초로 카메라에 담은 봉오동전투 시발점인 삼둔자, 너른 인삼밭으로 변해 버린 청산리대첩 최대 격전지 어랑촌 일대 영상 등은 사료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반 PD는 "북간도의 특징은 돌, 풀, 옥수수밭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며 "장암동학살사건(청산리대첩 직후인 1920년 10월 말 용정시 장암동에서 일본군이 주민 36명을 학살한 사건) 현장에도 이를 알리는 비석이 하나 서 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반 PD의 눈길을 끈, 당대 북간도 한인 사회를 엿볼 수 있도록 돕는 사료가 있었다. 바로 1920년대 펼쳐진 배구 대회, 밴드부 등 서구 문화를 향유하던 시대상을 담은 사진들이다.

그는 "미국도 보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정보와 위안을 얻으려는 측면이 있다"며 "이처럼 북간도에 들어선 교회가 선진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은 물론 공동체 자치조직 기능까지 수행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단적인 예로 일제가 한일 병합조약에 따라 조선의 통치권을 빼앗은 1910년 전후, 북간도 일대에서는 기독교 전도·교육 활동이 활발히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명동촌은 집단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명동학교 등을 세워 '민족'과 '기독교'를 결합한 교육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자란 후대는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해방 뒤 남한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 PD는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교회를 통해 이뤄진 북간도 여권신장이었다. 당시 선진 교육, 민주주의 의식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교회의 역할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곳이 바로 북간도"라며 "해방 이후 남한 사회로 넘어온, 문익환(1918~1994) 목사를 위시한 북간도 출신 인사들이 민주화·인권 운동에 투신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갈수록 사라지는 자치조직…굉장히 애절했다"

'북간도의 십자가' 스틸컷(사진=CBS 제공)
이렇듯 '북간도의 십자가' 제작진은 100여 년 전 북간도 한인 사회에서 어떻게 십자가와 총이 공존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문익환 목사 등 북간도 2세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한국 현대사로 이어진 '북간도 정신'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가 사회적 지탄을 받는 요즘,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킬 필요가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반 PD는 "해방 뒤 북간도 기독교인들이 남한으로 내려오는 과정은 80분짜리 우리 영화로는 다 소개 못할 만큼 드라마틱했다"며 "현지 취재를 통해 만난 그 후손들을 보면서는 굉장히 애절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이른바 조선족에 대한 깊은 편견이 있잖아요. '북간도의 십자가' 취재를 위해 17일간 옌벤에 있다가 한국 공항에 도착해 밥을 먹는데, 그곳에서 접했던 것과 똑같은 말투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때 문득 든 생각이 '아, 이분들도 모두 굴곡진 역사 안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살아 오다가 이 땅으로 넘어왔구나'라는 깨달음이었죠."

그는 "옌벤 현지 사람들에 따르면 조선족 자치조직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더라"며 "젊은이들은 옌벤 대도시인 옌지(延吉)나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로 나가고, 나이 드신 분들은 한국에 와 간병인 등으로 일하고, 그 빈 땅에는 더 가난한 중국 한족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옌벤 한인 중심지로 알려진 장암동에 가봤더니 대부분 한족이 터를 잡은 채 살고 있더군요. 지난해 6월 현지 취재 당시 무더위 속에서 옌지 냉면을 너무 맛있게 먹은 일이 있었죠. 그때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서울 대림동에 옌지 냉면을 하는 식당이 있었어요. 그곳에 가서 먹으면서 직원들에게 자연스레 '고향이 어디냐'고 묻게 되더라고요. 정서적 간극이 무척 크다고 여겨 왔는데, 현지에 다녀온 뒤로 그들의 삶과 동포로서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반 PD는 "아픈 역사를 함께 지나온 그들에 대한 이러한 마음이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조금이나마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도 크다"며 "흔히 조선족으로 불리우는 그들 역시 동포이고, 어찌 보면 역사의 희생양인데 이들에 대한 우리네 이해가 너무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깊어졌다"고 강조했다.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구면서 민족운동과 기독교를 결합시킨 남다른 문화를 뿌리내리죠. 이는 당대 항일 독립운동은 물론 해방 뒤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칩니다. 10월 17일 개봉을 앞둔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바탕으로 북간도와 그곳 사람들의 숨겨진 가치를 조명합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나라 잃은 그들에게 '북간도'는 약속의 땅이었다
② 1백년 전 만주서 '간도 대통령'으로 불리운 한국인
③ 인삼밭 들어서 잊힌 '청산리대첩' 최대 격전지
④ 윤동주는 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나
⑤ 북간도 넘어간 카메라…조선족 너머 겨레를 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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