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영화영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 김보라 감독은 단편 '리코더 시험', '빨간 구두 아가씨', '귀걸이' 등을 선보인 후 지난 2013년 '벌새' 초고를 썼다. 김 감독은 언론 시사회 당시 "뭔가 뿌리가 뽑힌 것처럼 부유하던 시절의 꿈"에서 '벌새'가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됐던 경험과 말, 기억의 조각조각이 시나리오 형태가 됐다.
왜 1994년을 배경으로 열다섯 중학생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었을까. 지난달 20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 카페에서 만난 김 감독은 "제 중학교 시절이 특별했던 건 아니"라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어떤 억압이 시작되는 걸 피부로 느끼는 게 중학교 시절인 것 같다"라고 답했다.
'어린이'로서 여러 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웠던 초등학생 시절과 달리, 중학생부터는 '사회의 질서'를 받아들여야 하고 이때 오랫동안 남는 상처를 많이 경험한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인터뷰 중 '본질'이란 말을 열두 차례나 했을 정도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유년 시절의 상처가 싹 틔운 '벌새'
'벌새'는 김보라 감독의 자전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다. 어릴 적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에 살았고, 부모님이 방앗간을 했다. 고유하고 유일한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청소년기의 상처를 녹여냈다. 영화 속에서는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은희로 표현됐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억압들이 시작되는 걸 피부로 느끼는 게 중학교 시절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만 해도 아이라고 생각해서 노골적으로 서울대 가라는 압박을 안 하지만, 중학교 때는 '니네 이제 어른이니까 서울대 빨리 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가자마자 우열반 나누고 성적을 강조하고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우리에게 주입하는데, (그게) 저한테는 동의가 잘 안 됐어요. 그 시기가 제일 예민한 시기잖아요. '중2병'이라는 단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 단어가 생겼다는 건 (그때가) 필연적으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라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는) 사회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첫 시기이기도 한데, '나'의 중학 시절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학교에 다니면서 상처가 없다고 하면 되게 거짓말 같다고 할 정도로, 아무리 공부 잘하는 학생이라도 상처를 받죠. 친구 중에 부산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반에만 에어컨이 있고 일반 교실엔 선풍기가 있었다고 해요. SKY반 애들에게만 주어진 게, 막상 그걸 혜택받는 친구는 되게 불편했다고 하더라고요.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는 그런 구조에서 우리가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상처가 있는데, 공통의 서사로 그걸 같이 들여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 감독은 공부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중학교 때 안 하고 많이 놀았다면서도 "압박은 항상 있었다"라고 밝혔다. 교사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를 손쉽게 규정했고, 덕분에 김 감독은 반 안에서 이미 도태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외 인간의 기분을 느꼈다. 고등학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 성적이 좋아지자 대접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김 감독은 "갑자기 내가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굉장히 싫더라. 공부를 못한다고 없는 사람 날라리 취급하는 것도 싫지만. 어린 마음으로는 (이 태도 변화가) 웃겼고 시니컬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대접을 잘해줘도 왜 싫었을까? 본질적으로 나를 알고 그런 건 아니지 않나. 나의 성적을 갖고 대우가 달라진다는 게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어떻게 인간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대할 수 있을까?'
'벌새'에서 은희는 아마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를 학교와 가정에서 안식을 찾지 못한다. 가부장적인 아빠(정인기 분)와 엄마(이승연 분)의 신경은 온통 우등생인 아들 대훈(손상연 분)에게 가 있다. 반대로 대치동에 살면서 성적이 나빠 강북으로 학교 다니는 맏딸 수희(박수연 분)는 집안의 '창피'로서 관심을 받는다. 막내인 은희는 늘 뒷전이다.
김 감독 또한 학창 시절 학교를 아이들을 짓누르는 공간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사람을 '본질'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에 아이들이 먼저 놀란 거다. 예를 들어 두발 규정도 너무나 셌다. 복도에서 머리가 잘린 경험도 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이들 잘렸다. 가위 들고 다니면서 자르는 게 그때만 해도 너무 일상의 풍경이라,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부모님이 쫓아오지도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스쿨 미투'(학교에서 일어난 미투 운동, Me_Too는 '나도 말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는 일)가 교단을 들끓게 했다. 학교 내 성추행과 폭력은 역사가 오랜 일이다.
김 감독은 어릴 때부터 차별과 무시가 일상 곳곳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목격했다. 어릴 적 가족 여행을 하며 비행기를 처음 타 본 그는 퍼스트클래스, 비즈니스석을 지나오며 '왜 저긴 저렇게 넓고 여긴 달라?'라고 엄마에게 물었다. 그때 엄마는 돈을 많이 낸 사람은 넓은 곳에, 적게 낸 사람은 여기 앉는 거라고 답했다고. 김 감독은 그 말을 듣고 엄마가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는 오히려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걸 금방 아는 것 같다"라며 김 감독이 꺼낸 다른 사례는 '명절 때 남녀 밥 따로 먹기'였다. 시댁 큰집 제사를 지낼 때 여자들은 남자들이 남긴 음식을 먹는다는 친구의 얘기를 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가 "왜 여자들은 밥 안 먹어?"라고 묻는데, 김 감독의 친구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고.
김 감독은 "어린아이는 오히려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걸 금방 아는 것 같다. 이 아이의 눈에는 굉장히 '자명하게 틀린 일'인데, 우리는 이렇게 비인간적인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거다. 우리가 되게 일상으로 여겼던 비인간적인 야만의 일상과 시대를 좀 돌아보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 3시간 30분→2시간 18분, '벌새'가 짧아진 여정
'비인간적인 야만의 일상과 시대'를 돌아보고 싶어서 배경을 1994년으로 삼았다. 1994년에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극중 대사처럼 다리가 무너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도로 성장해 온 한국 사회는 1990년대 들어 절정을 맞았고, 더 높이 올라갈 것만을 바라보고 있던 시기였기에.
"고도로 압축된 시간 안에서 달려왔었고, 그건 많은 사람을 병들게 하는 방식이었어요. 그 다리가 무너졌을 때 '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겠다'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너무 아픈 방식이지만, 마치 경보음을 울리듯이요. 하지만 그다음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고, IMF(구제금융사태)가 왔죠. 우리가 어떤 속도와 모양으로 달리고 있었는지 너무나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 도미노가 터지듯 일어났던 것 같아요. (성수대교 사건은) 그 기점 같은 느낌이었고요."
성수대교 장면 외에도 수희의 여러 장면이 잘렸다. 김 감독은 "(은희와) 수희와의 관계가 되게 많았는데 집중과 생략 과정에서 많이 빠졌다. 그게 되게 아쉬웠다"고 말했다. 박수연이 워낙 훌륭하게 수희를 연기해냈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 김 감독은 "박수연 배우님은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님이다. 표정에 너무나 많은 것이 드러나는 정말 멋진 배우"라고 치켜세웠다.
영상으로 볼 순 없지만 시나리오 원형을 만나볼 기회는 있다. 영화 개봉일에 맞춰 나온 책 '벌새-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을 통해서다. 무삭제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정희진 여성학자를 비롯해 네 명이 쓴 '벌새' 심층 리뷰가 실려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벡델 테스트'로 유명한 미국의 그래픽 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과의 대담이다.
김 감독은 "벡델을 실제로 만났고 그의 집에서 대담을 했다. 레즈비언인 벡델은 버몬트에서 아내분이랑 사는데, 두 분이 자연을 벗 삼아서 소소하게 되게 행복하게 살고 있더라. 그 집에서 이틀 동안 대담한 결과가 담겼다. 페이지가 제법 되는 두꺼운 책"이라고 소개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