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메가박스 월드컵경기장에서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스페셜 포럼 '바리터 30주년의 의미를 말하다'가 열렸다. 최초로 여성주의 영화 제작을 표방한 독립영화 제작집단 '바리터' 멤버들이 모여 창립 배경과 여성공동체적 제작·배급 방식, 한국 여성영화사에 남긴 흔적 등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김소영 감독 겸 한예종 영상원 교수, 변영주 감독, 서선영 시나리오 작가, 김영 미루픽처스 대표, 도성희 북경연예전수학원 교수, 권은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소연 프로듀서가 참석했다.
변영주 감독은 "당시 충무로에 깐느라는 카페가 있었다. 그때 모든 영화인의 소원은 깐느였던 것 같다. 그 카페에서 의기투합했고, 신나고 되게 즐거웠다. 우리 정기적으로 모이자 해서 이대 전철역 근처에 정말 한 평짜리 사무실을 잡고 자주 만나 술 먹고 놀던 게 저는 바리터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바리터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김소영 감독은 "역사나 역사 이전의 여성의 고난을 상징하는 서사가 바리데기 서사다. 버려졌다가 자기의 새로운 세상을 이룬 이야기다. 그래서 바리데기였고, 여성들이 모이는 장소와 터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바리데기'와 '터'를 합해서 바리터라고 지었다"라고 설명했다.
1955년부터 1997년까지 극영화를 만든 여성 감독이 7명에 불과했을 만큼, '영화 하는 여자'의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바리터가 처음 생긴 1989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김 감독은 "많은 남성들이 바리터라는 이름을 전혀 이해 못 하고, '빨래터'라고 불렀다"라고 말했고, 서선영 작가는 "여성들이 모여서 영화를 한다는 걸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파리떼'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고 부연했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고, 만들고 싶어 하는 여성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 '시대'였기에, 못 들을 말도 많이 들었다. 당시 연극영화 대학원에 간 후 소개로 충무로에 갔던 도성희 교수는 "열심히 작품을 개발하고 창작열 불태우는 환경이 아니었다. 저보고는 '양갓집 규수 같은데 여길 왜 오셨어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더라. 그래도 좀 버텨보려고 했는데, 기자들이 와서는 춤추러 캬바레 가자고 그러더라. 그랬던 때다"라며 "지금 봐도 사회 안에서 순종적으로 남들이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해도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바리터로) 만나게 됐다"고 밝혔다.
자신을 준회원이라 소개한 김소연 프로듀서는 "저는 변영주 감독님 따라서 바리터에 오게 됐다. 학교에서 영화 서클을 했는데 거긴 남성분들이 많았다. 저와 공감을 이루는 선배들이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 변 감독님 보고 바리터로 갔고, 영화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 여성들이 주체가 돼서 모여 있으니까 그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권은선 부집행위원장은 "남자들 없고, 다른 눈치 안 보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여자 선배들이 항상 그곳에 있고 술도 마셔서 이런 것들이 너무 좋았다"라고 전했다.
스페셜 토크 전에는 바리터의 첫 작품인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가 상영됐다. 한국여성민우회와 바리터가 공동 제작한 이 작품은 1,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는 회사 일과 가사노동 이중고에 시달리는 기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를 다루고, 2부는 기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주인 의식을 키워가는 과정을 담았다.
이어, "(그 말 때문에) 우리는 독해져 있는 상태였고, 여성민우회에서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의 교육용 영화를 만드는 데 제작비 600만 원으로 해 달라고 했다.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 상태에서 이 작품이 시작된 것"이라고 전했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김소영 감독이 연출을, 변영주 감독이 촬영을 담당했다. 원래는 장산곶매의 이용배 감독이 하려고 했으나 '파업전야'를 준비해야 해서 빠졌다. '스틸 카메라 한 번 찍어본 적 없었던' 변 감독이 16㎜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시작했다. 김 감독은 "여성들이 스태프로 참여해서 여성주의 영화로 만들자는 게 저희의 목표가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1980년대 후반은 민주화뿐 아니라 '노동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노동운동의 물결도 거셌던 시기다. 남성 노동자 중심의 '하드한 노동운동'을 다룬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와중에, 사무직 여성 노동자를 다룬 바리터의 시도는 주목받거나 환영받지 못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서 작가는 "당시 노동운동 관점에서는 좀 아웃사이더 느낌이었다"라며 "'파업전야' 찍었던 선배들도 '야, 뭐 그런 걸 찍고 있냐?' 얘기해서 마음이 조금은 위축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당시만 해도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의 수는 적었다. 어떤 영화를 만든다고 제작 신고를 해야만 극장 개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변 감독은 "독립영화는 만들고 보여주는 것 자체가 (그때 당시엔) 불법이었다"라고 말했다.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초청받은 대학교에 가서 트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서 작가는 "'파업전야'는 (상영)하면 많은 사람이 모여있고, 데모할 준비 다 돼 있고, 끝나면 다 (데모하러) 나가고 했지만 저희 영화는 정말 쓸쓸했다. 관심이 없는 거다, 저 테마에 대해. 정말 쓸쓸하게 상영하고, (영화에) 공감하지 않은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쓸쓸하게 돌아오는 게 항상… 그랬다"라고 기억했다.
바리터의 두 번째 작품은 '우리네 아이들'이었다. 변 감독은 "'혜영이-용철이 사건'이라고 해서 엄마가 아이를 맡길 수 없어서 문을 잠그고 일을 하러 간 사이에, 아이들이 불장난해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 영결식부터 시작해서 '우리네 아이들'이란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라고 설명했다. 도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
김 감독이 박사 학위 논문 때문에 유학 가고, 도 교수가 중국으로 망명을 하는 등 각자 신상에 변화가 생김에 따라 바리터는 자연스럽게 활동을 멈추게 됐다. 변 감독은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만들었고, 김영 대표는 페미니즘 영화제를 열었다. 바리터 출신들이 다시 만나게 된 건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시작된 1997년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거부감이 없는 시대였다. 그게 뭔지 잘 모르던 시대기 때문"이라며 웃음을 유발한 변 감독은 "어떤 후회도 없는데 딱 하나 후회되는 게 우리는 왜 우리가 페미니스트이기 위해서 세상 왼쪽에 있는 좌파임을, 가장 비타협적인 독립영화인임을 증명해야 했을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변 감독은 '움', '연분홍치마'를 거론하며 "우리는 (이곳들보다) 훨씬 더 결기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해', '넌 이 영화 봤니?', '난 이런 영화 만들고 싶어'라는 얘기를 어떤 편견도 없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라서 좋았다"라고 덧붙였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저희 30주년 마련해주시고 (여기에) 많은 분들 와주셔서 굉장히 감사드려요. 사실은 우리가 영화라는 엔드 프로덕트가 있지만 우리는 영화로 가는 하나의 꼬뮨이었어요. 페미니스트 꼬뮨, 여성주의 꼬뮨으로서 그 정신, 유산을 함께 나누고 싶었어요. (…) 정말 계급운동 노동운동이 한창이었을 때 작품도 같이 하고, 굉장히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살았던 것, 그걸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김소영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