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파기함으로써 한·일 관계는 물론이고 한·미 관계마저 방판길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에 대해 일본의 반응은 그렇다 치더라도 미국의 입장이 상당히 거칠다.
우리 정부는 "미국 측이 우리 정부 입장을 이해했다"고 했지만 폼페이고 미 국무장관은 오늘 강경화 외교장관과의 통화에서 "한국의 결정에 실망스럽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미국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 이후 격앙된 한국에 대해 지소미아의 유지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종료한 데 대한 불쾌감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강경화 장관은 지소미아 종료와 한미동맹과는 별개의 사안이며 한미 동맹은 끊임없이 공조를 강화·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진무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공개적인 불만 표출로 미뤄볼 때 문재인 정부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나 자신의 이해관계와 감정, 미국의 국익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가차 없이 보복조치를 취하거나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고 나오는 예측이 불가능한 지도자다.
애플의 요구를 받은 바 있는 트럼프는 미국 재계와 세계 경제인들이 보란 듯이 삼성전자를 압박할 수 있고, 주한미군방위비의 천문학적인 인상과 중거리 미사일 배치 등을 들고 나와 한국을 벼랑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를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이고 장사꾼 같은 발언과 조치에 대한 대응 카드를 다각도로 마련할 필요성이 그래서 제기된다.
22일 청와대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소미아를 파기하겠다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대미 외교전을 강화해야 한다.
트럼프의 일방통행식의 한미 외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그래도 한반도 주변 4대 강국 중에서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보다 한결 나은 강대국이자 우리의 우방이다.
우리 정부가 일본과는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일본의 추가 조치에 대한 사전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일본은 28일 추가 보복전을 들고 나올 개연성이 그 어는 때 보다 커졌다.
고노 다로 일본 외상은 23일 담화를 통해 "한국 정부는 이번 협정 종료 결정에 있어 일본의 수출 통제 운용 재검토를 연결하고 있지만, 두 사안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 한국 정부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 한다"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이날 G7정상회의에 참석차 출국하면서 "한국 정부가 국가 간 약속을 지키도록 요구해 나갈 생각이며 국가 간 신뢰 관계를 해치는 대응이 유감스럽게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확실히 연대하는 등 국제 여론전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선언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미소를 머금을 것이다.
한·미·일 3각 안보 공조가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미국과의 무역과 환율전쟁을 겪고 있는 중국에겐 호재입니다.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팽창은 갈수록 확산·심화되고 있음은 물론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위협도 나날이 도를 더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국 시진핑 주석이 사드 보복을 철회할 것도 아니고, '중국몽' 실현을 위한 중국 굴기를 멈출 것 같지도 않는 중국 중심주의자다.
자칫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의 안보 정세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지 말란 법이 없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안정됐던 국제 질서가 당장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고 우려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정부의 외교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감정적이고 강경한 대응은 기분은 좋을지언정 국익에는 도움이 안 되는 경우를, 역사가 우리에게 일갈하는 교훈이다.
이 위중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권은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 가족 등의 문제로 살벌해지고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조국 후보 지키기에 결사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반면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국면전환을 위해 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했다며 벼르고 있다.
조국 후보 문제가 국가의 안보와 외교보다 더 위중할 수는 없다.
노태우 정권 하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노재봉 전 총리가 "사안이 발생하면 더 큰 사안으로 덮으면 된다"고 말했듯이, 청와대와 민주당은 지소미아 파기 선언으로 조국 사태가 조속히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자유한국당 같은 야당은 어떻게든 조국 사태를 더 끌고 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반추해볼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어리석은 자가 역사를 망친다"고 설파했다.